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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영화 청년의 21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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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후남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후남문화부 차장

이후남문화부 차장

해마다 이맘때 프랑스에서 열리는 칸영화제는 영화인이나 영화광에게는 꿈같은 잔치다. 전 세계 주목할 만한 예술영화를 한자리에 불러모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한껏 비추기 때문이다. 권위와 명성을 자랑하는 이 영화제도 시작은 미미했다. 칸은 본래 이름난 휴양지다. 그 비수기에 사람을 북적이게 할 생각으로 지역 상인들이 구상한 게 영화제였다. 초기 언론 보도를 보면 영화에 대한 비평보다는 어쩌다 칸에 온 할리우드 스타가 단연 뉴스였다.

그에 비하면 부산국제영화제의 출발은 뜨겁고 순수했다. 영화를 좋아하는 몇몇 청년이 한국에서도 영화제란 걸 해보자고 뜻을 모았다. 여러 영화인과 지자체와 기업이 힘을 더해 1996년 첫 번째 영화제가 열렸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요즘처럼 유명 스타가 대거 레드카펫에 선 것도 아닌데 전국에서 18만 명의 관객이 모였다. 이후 부산영화제의 역사는 90년대 중반부터 가시화된 한국 영화의 질적·양적 성장사에서 큰 장을 차지한다.

물론 늘 순탄하진 않았다. 초창기 영화제가 열린 낡은 극장에선 쥐가 나와 외국인 심사위원을 무는 황당한 일도 벌어졌다. ‘몇몇 청년’ 중 하나이자 출범 이래 줄곧 아시아 영화를 담당한 김지석 프로그래머가 들려준 얘기다. 그를 인터뷰한 건 영화제가 어느덧 열 돌을 앞둔 2005년이었다. 프로그래머는 결코 화려한 일도, 여유 있는 일도 아니었지만 그는 부산예술대 교수도 그만두고 영화제에 전념하던 참이었다. 영화제 출범 이듬해 태어난 아들이 ‘아시아 프로그래머가 꿈’이라고 하더라는 말에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요즘 말로 ‘성공한 덕후’, 즉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된 부러운 경우였다.

한데 그로부터 약 10년 뒤 부산영화제는 전례 없이 혹독한 시련을 맞는다. 세월호 소재 다큐 ‘다이빙벨’ 상영을 두고 부산시와 겪은 갈등이 시차를 두고 부메랑이 되어 영화제를 흔들었다. 요 몇 해 동안 그를 직접 보진 못했지만 21년간 영화제를 지켜온 그가 어느 때보다 힘든 시간을 보냈으리란 건 쉬운 짐작이다.

올가을 22회 영화제는 그 없이 열린다. 지난주 칸영화제 출장 중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은 그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여러 나라, 특히 아시아 각국 영화인이 애도의 말을 남겼다. 취재에 도움을 청할 때마다 그가 꼼꼼하게 들려준 아시아 각지의 영화 동향, 정치적 이유로 자국에서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 감독에 대한 살뜰한 걱정을 되새기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는 영화에, 특히 아시아 영화에 성실했다.

프랑스 감독 트뤼포는 영화광의 3단계를 이렇게 꼽았다. 첫째는 좋아하는 영화를 거듭 보는 것, 둘째는 영화에 대해 글을 쓰는 것, 셋째는 직접 영화를 만드는 것. 지난 18일 세상을 떠난 부산국제영화제 김지석 부집행위원장 겸 수석프로그래머는 영화를 참 좋아했고 영화제를 만들었다. 어쩌면 이런 게 문화의 힘이다. 그 열정과 애정이 잊히지 않기를, 부산영화제가 성장통을 딛고 다시 아낌없는 사랑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후남 문화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