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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듯하게 본다는 게 그렇게 쉽지는 않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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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2호 22면

프랑크푸르트발 서울행 루프트한자의 좌석은 안락하고 쾌적했다. 몇 년 동안 집중해서 독일을 드나든 이래 처음으로 깊은 잠에 빠졌으니까. 도착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나오고서야 깼다. 열 시간 남짓의 비행은 기내식 먹은 기억과 익숙한 서해의 풍경을 확인한 게 전부다. 비행기 타는 게 이토록 수월하다면 더 먼 거리라도 기꺼이 가겠다.

윤광준의 新 생활명품 #<61> 바우하우스 수평계

독일의 봄 또한 아름다웠다. 끝 모르게 이어진 광활한 대지의 노란색 유채꽃은 압권이었다. 햇빛 받은 나무에 새로 돋는 연녹색 잎의 찬란함은 또 어땠나. 입맛 돋우는 아스파라거스의 담백함과 향도 좋았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오월의 풍요로움은 거기라고 다르지 않았다.

여행은 베를린에서 시작됐다. 차를 빌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갔고 다시 바이마르로 돌아왔다. 자동차의 적산 거리계 숫자가 1300km를 넘었다. 관심의 대상은 놓칠 수 없다. ‘데 스틸’ 관련 전시와 자료관을 뒤졌다. 이동 거리만큼 쌓여가는 사들인 책과 자료의 부피가 어느새 자동차 뒷좌석을 채울 만큼 늘었다.

두꺼운 책은 비슷한 부피의 벽돌만큼 무겁다. 몇 권만 겹쳐 놓으면 만만하게 들 수 있는 무게가 아니다. 서울까지의 운송이 문제다. 포장 박스를 구해 단단히 묶고 포장해 우체국까지 가야 한다. 간단해 보이는 일이 전혀 간단하지 않다. 웬만한 일은 간편하고 빠르게 처리되는 우리나라가 살기 좋은 곳이란 생각이 새삼 든다. 도시엔 생활 반경 몇 킬로미터 안에 온갖 편의 시설들이 있다. 독일은 그렇지 않았다. 박스를 구하는 일부터 운송접수를 마치기 위해 반나절을 허비했다.

바우하우스 매장의 놀라운 다양성

박스를 구하는 제일 쉬운 방법은 바우하우스를 찾는 것이다. 빨간 글씨로 된 ‘BAUHAUS’ 간판은 독일 전역에서 볼 수 있다. 바우하우스는 건축자재와 도구를 파는 체인점 쇼핑 몰이다. 우리가 추적하고 있는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집과 관련된 온갖 물품을 한 곳에 다 구비해 팔고 있을 뿐이다. 우리 같으면 대형 마트의 한 귀퉁이에 놓여져 있을 물건들이다. 바우하우스의 규모와 내용은 놀랄 만큼 크고 충실했다. 왜 이런 전문 쇼핑몰이 곳곳에 있을까.

사람을 불러 벽에 못 박는 일을 시킨다는 건 인건비가 비싼 독일에서 상상도 못한다. 집안의 웬만한 공사쯤은 직접 할 수 있어야 남편 노릇을 제대로 하는 거다. 오래전부터 스스로 물건을 만들어 쓰는 공예의 전통이 남아있는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남편들은 편하게 전화 한 통으로 모든 걸 해결한다. 대신 제 손길로 지탱하는 집안 일과 무엇인가를 만드는 즐거움은 잃어버리고 사는 게 분명하다.

진열된 물건들의 분화된 종류와 정교한 배치에 놀랐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더 놀랄만한 일들이 잔뜩 있다. 작업의 과정과 과정을 이어주는 도구가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는 점이다. 예를 들어 표면을 매끄럽게 갈아내는 사포 작업을 떠올려보자. 우리 같으면 적당한 사포만 사들고 나오면 다 해결될 거라 여긴다. 일을 해 보면 사포질 하는 게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된다. 사포를 어떻게 잡고 미느냐에 따라 결과가 다르다. 손잡이까지 구비해 둔 곳이 바우하우스다. 곱고 균일한 표면을 갈아내기 위해 사포의 눈 수에 맞는 크기와 형태의 코르크 뭉치를 판다. 용도에 따라 곡률을 달리한 코르크는 열 종류도 넘었다. 사포는 사람이 쥐고 쓰는 물건이다. 작업과 결과 사이를 촘촘하게 메워주는 방법의 세심함에 주목할 일이다.

작업 장갑의 다양함에도 놀랐다. 우리나라에선 흔한 목장갑으로 웬만한 일을 다 처리한다. 약간의 배려가 더해진, 미끄러지지 않는 고무 코팅된 장갑까진 봤다. 이것만 가지고 될까. 작업 내용에 따라 얇거나 두꺼운 장갑도 필요하다. 손의 감각을 방해하지 않는 유연성 높은 것도 있어야 한다. 뜨거운 물체를 잡을 땐 두껍고 열전도율이 낮은 재료의 장갑도 필요하다. 사이와 사이의 선택이란 얼마나 많은가. 작업 장갑만으로 한 칸을 채운 진열대는 독일 사람들의 생각을 그대로 읽게 해줬다. 세련이란 매끄럽게 연마되어 얻어지는 결과다. 이렇게 만든 물건이 절대 거칠 리 없다.

책 무게를 버틸 튼튼한 골판지 포장박스도 찾았다. 다음엔 포장 테이프다. 각기 다른 폭과 인장 강도를 지닌 OPP(oriented polyprpylene) 박스 테이프가 즐비하다. 내용을 모르면 선택조차 어렵다. 완충재인 뽁뽁이도 구했다. 이제야 안심이다. 제대로 포장되지 않아 내용물이 쏟아지는 택배 박스의 불안은 지워버려도 될 듯했다. 세상일 잘하려고 들면 무엇 하나 만만한 것이 없다.

‘무뚝뚝한 기능성’이 주는 신뢰

갑자기 마누라의 원성이 떠올랐다. 벽걸이 장식 선반을 걸어달라던 말을 흘려버리지 않았던가. 차일피일 미루었던 이유를 변명해야 한다. 수평을 잡아주는 도구인 수평계가 없어서다. 키 높이에 걸 기다란 선반은 벽 두 곳에 정확하게 못을 박아 고정시켜야 한다. 이전의 실패를 떠올렸다. 눈대중해 박은 못이 삐뚤어졌다. 다시 빼서 박은 못 자리의 콘크리트가 떨어져 나가 흉하게 드러났다. 못도 하나 제대로 박지 못한다는 마누라의 잔소리가 매서웠다. 무능한 남편이 되는 법 정말 쉽다.

콘크리트 벽에 정확한 수평을 맞춰 못 박는 일은 만만치 않다. 나름 머리를 써 스마트폰 앱인 수평계도 활용해 보았다. 잘 되느냐고? 눈높이 위 선반에 놓인 스마트폰 화면을 어떻게 보란 말인가. 누군가 테이블을 잡아주고 올라가 확인하면 된다고? 직접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대개 아는 척하게 마련이다. 눈과 손이 하는 실수는 잘 알아차리기 힘들다. 쓸데없는 보완이란 안 하는 편이 더 낫다.

쓸 만한 수평계를 마련해서 무능함을 만회해 보기로 했다. 보란 듯이 단번에 멋지게 장식 선반을 매달아 놓을 거다. 좋은 수평계를 찾아내야 한다. 그런데 수평계의 종류가 스무 개도 넘었다. 길이가 2m에 달하는 것도 있다. 건축용일 것이다. 길이를 달리한 수평계 가운데 레이저 기능이 담긴 디지털 표시 방식도 있다. 내게 필요한 물건이 아니다. 견고한 아날로그 방식의 기포식 수평계면 된다.

비슷한 물건은 이미 많이 나와 있다. LP 플레이어의 수평을 체크하는 작은 수평계는 몇 개나 가지고 있다. ‘메이드 인 저머니’의 신뢰를 갖고 싶었다.

진열대 한편에 금속 광채로 번쩍이는 수평계가 눈에 들어왔다. 기능이 곧 본질로 마무리된 무뚝뚝한 형태의 디자인이다. 정 가운데 수평을 중심으로 수직과 45°각도를 체크하는 수준기가 들어있다. 좌우 대칭으로 배치된 수준기는 충격과 먼지 대응하는 밀봉 타입이다. 어느 위치에서 보더라도 기포가 눈에 잘 띄는 투명한 재질도 좋았다.

나처럼 수평계에 열광하는 이들도 있다. 도구가 사이와 사이의 과정을 매끄럽게 이어주는 까닭이다. 삐뚤어지지 않게 장식 선반을 매달고 싶은 마음만으론 모자란다. 수평계가 있어야 안심이다. 의지와 결과 사이의 선택이 반듯함을 만들어주는 셈이다. 불안은 예측 가능의 확신 앞에선 힘을 쓰지 못한다. 이제 어림짐작의 불안함은 지웠다. 수평계 하나로 장식 선반은 비로소 제자리를 찾았다. 수평계를 일부러 마누라의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아두었다. 나의 무능 때문이 아니라 수평계가 없어 생긴 일이란 무언의 시위다.  ●

윤광준 : 글 쓰는 사진가. 일상의 소소함에서 재미와 가치를 찾고, 좋은 것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즐거운 삶의 바탕이란 지론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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