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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남자'에서 대통령으로…문재인 '라이프 스토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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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19대 대통령 당선인의 삶은 굴곡진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이다. 그는 한국 전쟁 중인 1953년 경남 거제도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피란민의 2남 3녀 중 장남이었다.

'흥남 철수' 피란민 아들로 태어나 #경남고 수석 입학, 사법연수원 차석 #시위 경력 탓에 판사 못 되고 낙향 #노동자 편에선 인권변호사로 활동 #"노무현의 부탁" 재수 끝 대통령 돼

문 당선인의 아버지는 함경도 흥남 출신이다. 전쟁 중 미 군선을 타고 월남해 거제에 정착했다. 영화 ‘국제시장’의 배경인 ‘흥남 철수’ 때였다.

그는 자서전 『운명』에서 당시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가능하면 혼자서 해결하는 것, 힘들게 보여도 일단 혼자 힘으로 해결하려고 부딪히는 것, 이런 자세가 자립심과 독립심을 키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가난했던 유년 시절과 사법시험 합격

경남고 재학 시절 모습(뒷줄 가운데) [중앙포토]

경남고 재학 시절 모습(뒷줄 가운데) [중앙포토]

문 당선인은 1968년 부산 명문 경남고(25회)를 수석 입학했다. 하지만 술ㆍ담배에 손을 댔고 싸움을 하다 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재수 끝에 4년 장학금을 받고 경희대 법대(72학번)에 들어갔다. 원래 역사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사학과를 가기엔 "점수가 아깝다"는 부모님과 담임 선생님의 만류로 법대를 선택했다.

문 당선인이 대학에 입학한 그해 10월 박정희 정권은 ‘유신’을 선포했다. 삶의 갈래에서 그는 고시 준비 대신 유신 반대 시위를 선택했다. 1975년 4월 인혁당 관계자들이 사형을 당하자 다음날 대규모 학내 시위를 주도한 끝에 체포돼 서대문구치소에 구속·수감됐다. 학교에서도 제적을 당했다.

문 당선인은 “교도소로 송치되던 날 호송차 철망을 통해 어머니를 봤다. 나를 보고 막 뛰어오며 손을 내미는 데 차는 점점 멀어져 가고…”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특전사령부 제1공수특전여단 복무 시절 [중앙포토]

특전사령부 제1공수특전여단 복무 시절 [중앙포토]

석방 후에는 군에 강제 징집됐다. 특전사령부 제1공수특전여단에 입대해 31개월의 복무를 마치고 1978년 제대했다.

제대 후엔 부친상을 겪었다. 문 당선인은 49재를 마친 다음날 전남 해남 대흥사에 들어가 고시공부에 몰두했다. “뒤늦게나마 한 번이라도 아들이 잘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고 했다.

이듬해인 1979년 문 당선인은 바램대로 1차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그 뒤 다시 시위로 구속 돼 계엄령 위반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2차 시험 합격증은 그래서 청량리경찰서 유치장에서 받았다. 3차 면접 시험을 앞두고 안기부(현 국정원) 직원이 “데모할 때와 생각이 같은가”라고 물었을 때도 그는 “내 행동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1981년 7년 연애 끝에 김정숙 여사와 결혼한 문 당선인 [중앙포토]

1981년 7년 연애 끝에 김정숙 여사와 결혼한 문 당선인 [중앙포토]

문 당선인은 사법연수원 시절 김정숙 여사와 7년의 연애 끝에 결혼했다. 박원순 서울시장, 고(故) 조영래 변호사, 박시환 대법관, 박병대 대법관 등이 그의 사법연수원 동기다.

‘82m 크레인 변론’ 인권 변호사

1982년 부산으로 낙향한 그는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법을 잘 모르거나 돈이 없어 애태우는 근로자를 돕고자 한다. 상담료는 받지 않는다’고 적힌 명함을 들고 다녔다.

문 당선인은 그때 그곳에서 자신의 운명을 바꾼 사람도 만났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80년대 후반 부산에선 안기부의 요시찰 대상 재야 인권 변호사가 4명 있었다. 그와 김광일ㆍ이흥록, 그리고 노 전 대통령이었다.

19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 크레인 농성' 당시 모습 [중앙포토]

19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 크레인 농성' 당시 모습 [중앙포토]

90년 현대중공업에서 골리앗 크레인 농성이 벌어졌다. 문재인 당선인은 82m 높이의 크레인 꼭대기에 올라가 변론을 했다. 주변에서 만류하자 “거기에 노동자가 있고 나더러 도와 달라 하는데 가봐야 할 것 아니냐”고 했다.

검은 봉투에 속옷만 챙긴 민정수석

문 당선인은 2002년 대선 때 정계에 첫 발을 디뎠다. 노 전 대통령과의 인연으로 부산선거대책위원회 본부장 직을 맡으면서다. 노 전 대통령이 선거에서 승리하자 “민정수석으로 끝낸다”는 조건으로 청와대에 들어갔다. 당시 검은 비닐 봉투에 속옷ㆍ양말만 싸 들고 서울로 올라왔다고 한다.

문 당선인은 하지만 불과 1년 만에 청와대를 다시 나왔다. 총선에 출마하라는 주변의 성화 때문이었다. 재야로 돌아와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던 그는 노 전 대통령 탄핵 소식에 변호인단 간사로 ‘컴백’했다.

2003년 노무현 정부의 민정수석으로 임명된 문 당선인 [중앙포토]

2003년 노무현 정부의 민정수석으로 임명된 문 당선인 [중앙포토]

2007년엔 노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이 됐다.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 그는 치아를 10개나 뽑았다.

2009년 5월. 노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문 당선인이 국장(國葬) 상주를 맡았다. 분위기는 험악했다. 국장에 참석한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백원우 전 의원이 “여기가 어디라고…. 사죄하시오”라고 소리치다 끌려나가기도 했다. 문 당선인 이 전 대통령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 그리고 조용히 눈물을 닦았다.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는 저서『닥치고 정치』에서 “타고난 애티튜드(Attitudeㆍ태도)의 힘을 느꼈다”고 적었다. 문 당선인은 이후 재단법인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재단’의 이사장직을 맡았다.

최다득표 낙선, 위기론이 대세론으로

2012년 총선에서 부산 사상에 출마해 당선된 문 당선인

2012년 총선에서 부산 사상에 출마해 당선된 문 당선인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 못하게 됐습니다.” 문 당선인은 2011년 발간한 자신의 자서전 『운명』에서 노 전 대통령을 향해 이렇게 고백했다. 그리고 이듬해 총선에 출마해 국회의원(부산 사상)에 당선됐다.

같은 해 18대 대선에 출마한 문 박근혜 전 대통령과 맞붙었다. 문 당선인은 당시 무소속 안철수 후보와 단일화에 성공해 야권 후보로 나섰다. 역대 당선자를 능가하는 득표(1469만 표ㆍ48%)를 했지만 결국 낙선의 쓴잔을 마셨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대선 패배의 반성문 격인 『1219 끝이 시작이다』에서 “노무현을 넘어서는 것이 그의 마지막 부탁이라는 것을 안다. 꼭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문 당선인은 이후 차기 대선 주자로 본격적인 경력을 쌓아 나갔다. 2015년 초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로 선출됐다. 하지만 재ㆍ보선에서 패배하고 안철수 전 대표가 탈당해 따로 국민의당을 만드는 등 위기가 이어졌다. “사퇴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친문(親文, 친 문재인) 패권주의’에 대한 비판도 거셌다.

지난 4월 3일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선출 당시 모습 [중앙포토]

지난 4월 3일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선출 당시 모습 [중앙포토]

하지만 이어진 4ㆍ13 총선이 위기를 기회로 바꿔다. 그가 이끈 더불어민주당은 총 123석을 얻어 제1당 자리를 차지했다. 당초 100석도 얻기 힘들 것이란 전망을 훌쩍 뛰어 넘은 결과였다. '문재인 위기론'은 '문재인 대세론'으로 바뀌었다.

온 나라를 충격에 몰아 넣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박 전 대통령이 탄핵되며 문 당선인은 유력 대선 주자 자리를 굳혔고, 지난 4월 3일 당 대선 후보로 공식 선출됐다.

문 당선인은 19대 대선 전 여러 자리에서 “삼수는 없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9일 대선에서 승리하며 그의 말은 현실이 됐다. 문 당선인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약 2개월 간 ‘공석’이었던 대통령 직을 이어 받아, 앞으로 5년간 대한민국을 이끌게 된다.

손국희 기자 9k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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