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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수 대신 진정성을 기대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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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정헌
이정헌 기자 중앙일보 도쿄특파원
이정헌도쿄 특파원

이정헌도쿄 특파원

2014년 4월 1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 주재로 각료회의(국무회의)가 열렸다. 소비세율을 17년 만에 5%에서 8%로 인상하는 첫날, 관심이 집중됐다. 아베 총리는 “사회보장·세제 개혁에 대한 국민의 협력과 이해를 얻을 수 있도록 정중하게 설명하라”고 지시했다. 각료들도 부처별 의견을 밝혔다.

총리 관저에서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아침 정례 각료회의가 개최된다. 시급한 현안이 있을 때 임시 각료회의와 간담회도 소집된다. 이날 회의가 특히 주목을 받은 이유는 참석자들의 명단과 발언 내용이 최초로 회의록에 담기기 때문이었다. 1885년 내각제가 시행된 이후 130년 가까이 각료회의는 베일에 가려졌다. 최종 결정만 공표됐다.

첫 회의록이 총리 관저 홈페이지에 게시된 것은 각료회의 3주 후인 4월 22일.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투명성 향상과 정보 공개, 국민에 대한 설명 책임 완수를 위해 회의록을 공개했다”고 말했다.

일본 내각제 초기 메이지(明治) 정부는 부국강병과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민권(民権)파 계열 야당을 자극하지 않겠다며, 이후 쇼와(昭和) 정부는 군사 기밀의 누출 우려가 있다며 각료회의 비공개 원칙을 고수했다. 1945년 패전 이후에도 회의록은 작성되지 않았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은 일본 국민이 불투명한 국정 운영의 문제점을 절감한 계기가 됐다. 민주당 정권은 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 직후부터 이듬해 1월까지 15회에 걸쳐 긴급 사태 각료회의를 개최했다. 그런데 10개 회의에선 전혀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원전 사고 은폐 의혹이 불거졌지만 책임소재 규명은 불가능했다.

아베 정권은 2012년 재집권에 성공한 이후 각료회의 회의록 작성과 30년 후 공개를 의무화하는 ‘공문서 관리법’ 개정을 추진했다. 그러다 갑자기 2014년 3월 법 개정 절차도 생략한 채 ‘회의록 작성과 3주 후 공개’ 방침을 서둘러 발표했다. ‘특정 비밀 보호법’에 대한 국민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즉흥적인 꼼수라는 지적을 받았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났다. 각료회의는 변질됐다. 총리 등 참석자들은 거의 입을 열지 않는다. 카메라를 향해 포즈만 취하고 곧바로 일어선다. 올해 1~3월에 열린 26차례 회의의 총 발언자는 11명. 전 국민 감시사회를 만들 것이란 비판 여론 속에 ‘공모죄’ 법안을 결정한 3월 21일에도 관방 부장관이 법안 개요만 설명했을 뿐이다. 중요 정책은 관계 각료회의에서 여전히 비공개로 결정한다. 한국의 19대 대통령이 9일 선출된다. 당선자는 곧바로 대통령 업무를 시작한다.

정권 인수 기간이 없는 탓에 설익은 정책들을 쏟아낼 가능성이 크다. 특히 박근혜 정권의 불통과 폐쇄적인 국정 운영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의욕만으로 성급하게 관련 대책을 내놓지 않을까 우려된다. 겉만 번지르르한 정책은 잠시 환심을 살 수 있어도 곧 바닥을 드러낸다. 진정성 있는 자세로 국민과 소통하며 투명하게 국정을 운영해 주길 기대한다.

이정헌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