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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히토 ‘전쟁할 수 있는 일본’에 자리 던지며 경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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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호 10면

[글로벌 뉴스토리아] ‘특례법’ 의결 앞둔 일왕 讓位의 정치 코드

아키히토 일왕 [중앙포토]

아키히토 일왕 [중앙포토]

올 5월은 일본의 미래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기다. 지난 3일은 일본 평화헌법이 공포된 지 7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아베 신조 총리는 이날 요미우리와의 인터뷰에서 “도쿄 올림픽이 열리는 2020년 새 헌법을 시행하고 싶다”며 처음으로 개헌 스케줄을 구체적으로 내놨다. 필생의 목표인 개헌에 본격 시동을 걸겠다는 선언이다. 아베는 메이지유신 150주년을 맞는 2018년을 전후해 평화헌법을 개정, 일본을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 바꾸려고 오랫동안 준비해왔다.

아베, 2020년 개헌 일정 첫 공개 #일왕의 국가원수화 통해 #‘제2의 메이지유신’ 노려 #일왕, 생전 양위 카드로 제동 #1400년 전통의 양위정치 부활

아베가 노리는 ‘제2의 메이지유신’에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전쟁 금지를 명시한 평화헌법 9조의 무력화와 자위대의 정식 군대화, 그리고 일왕의 국가원수화다. 아베는 이번 인터뷰에서 ‘새 헌법에 자위대 관련 규정을 새로 넣어 자위대를 합헌화하겠다’는 의사도 숨기지 않았다. 1954년 창설된 자위대는 이지스 구축함에 준항공모함에 이르는 막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전 세계에서 파병활동을 벌이면서 실질적인 ‘보통 군대’로 활동 중이다. 그럼에도 헌법에 아무런 규정이 없어 존재와 활동이 ‘위헌’이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따라서 일단 자위대를 합헌화한 뒤 기회를 봐서 슬그머니 정식 군대로 전환해 ‘전쟁할 수 있는 일본’을 공식화하겠다는 것이 아베의 속셈으로 읽힌다.

아베를 중심으로 한 일본 우익은 일왕의 위상도 ‘상징적 존재’에서 ‘국가원수’로 바꾸겠다는 의도를 드러내왔다. 하지만 아베는 지난해 8월 8일 불의의 일격을 당했다. 아키히토(明仁·84) 일왕이 이날 비디오 메시지를 통해 양위 의사를 직접 밝힌 것이다. 일왕을 정점으로 전 국민이 하나로 총의를 모아 침략전쟁에 나섰던 ‘군국주의의 추억’을 재연하려는 아베의 구상이 거대한 복병을 만난 셈이다.

아베는 지난 3월 국회에서 아키히토 일왕 일대에 한해 양위할 수 있도록 하는 특례법을 제정하자는 의견이 나오자 “엄숙히 받아들여 즉각 법안 입안에 착수하겠다”고 밝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아베는 ‘국민의 총의(전체 민의)’로 퇴위를 실현하고자 국회에서 만장일치 또는 압도적 다수로 법안을 가결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며 여운을 남겼다. ‘국민 총의’라는 용어에서 군국주의의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

제국헌법에선 국가원수, 평화헌법엔 국가 상징

특례법은 이르면 5월 19일 각의에서 이를 결정할 방침이다. 일본 정부는 아키히토 일왕이 즉위 30년이 되는 해이자, 85세 생일을 맞는 내년 12월 23일을 기해 양위 절차를 매듭짓고 2019년 1월 1일부터 현재의 헤이세이(平成)가 아닌 새 연호를 사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왕위는 나루히토(德仁·57) 왕세자가 물려받게 될 전망이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공부한 유학파인 나루히토 왕세자는 부친과 마찬가지로 평화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양위가 이뤄지면 아키히토 일왕은 현재 나루히토 왕세자 부부가 살고 있는 도쿄 미나토(港)구의 도구고쇼(東宮御所)로 이주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일본 정부가 일왕의 생전 양위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데는 배경이 있다. 메이지시대인 1889년 공포됐다 태평양전쟁 패전 이후 폐기된 대일본제국헌법(구헌법)에선 일왕을 국가의 중심으로 삼았다. 헌법 1조부터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로 시작돼 ‘황위는 황실전범이 규정하는 바에 따라 황남자손이 이를 계승한다’는 2조로 이어진다. 3조는 ‘천황은 신성해 침해해선 안 된다’, 4조는 ‘천황은 국가원수로서 통치권을 총람하고 이 헌법의 조항에 따라 이를 행한다’, 11조는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한다’로 돼 있다. 일왕을 국가원수이자 군통수권자, 그리고 신성불가침한 존재로 규정했다. 여기에 ‘천황대권’이라고 불리는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했다. 일본을 일왕과 국민이 일체가 되는 ‘군민일체의 대가족국가’로 규정했다. 아베 정권이 쓰고 있는 ‘국민 총의’라는 용어와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다. 군국주의 세력은 일왕의 권위를 앞세워 국민에게 충성과 복종, 희생을 강요하면서 전쟁으로 내몰았다. 일왕 히로히토에게 제기되는 전쟁책임론의 근거다.

하지만 패전 이후 미군 점령하에서 제정돼 1947년 시행에 들어간 평화헌법(공식 명칭은 일본국헌법)은 1조에서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 그 지위는 주권이 소재하는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초한다’라고 규정했다. 구헌법에서 일왕이 보유했던 국가원수직과 군통수권자 규정을 삭제하고 위상을 ‘상징’으로 바꾸었다. 이로써 정치 개입이나 발언이 사실상 금지됐다. 이후 히로히토는 상징적인 의전 활동만 하다 1989년 세상을 떠났다.

식민 지배에 “통석의 염” 밝힌 친한파

아키히토 일왕은 적극적인 친한파 평화주의자였다. 기회 있을 때마다 평화를 강조하고 한국에 친근감을 나타냈다. 아키히토 일왕은 1990년 “우리나라에 의해 초래된 불행한 시기에 귀국민이 겪었던 고통을 생각하며 저는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수 없다”고 발언해 침략 역사의 가해 주체가 일본임을 분명히 했다. 2001년 한·일 월드컵을 앞둔 시기에는 우익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1300년 전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었다”며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2005년의 사이판 방문 때는 한국인 위령탑도 찾았다. 패전 70주년인 2015년 1월에는 “만주사변에서 시작된 이 전쟁의 역사를 충분히 배워 향후 일본의 모습을 전망하는 것이 지금 대단히 중요하다”고 일갈했다. 과거 침략의 역사를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미화하려는 역사수정주의 세력에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과거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미래 설계의 재료로 삼자’는 메시지를 전한 셈이다. 다시는 일 왕실이 우익정치인의 들러리가 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런 아키히토가 생전 퇴임 의사를 밝힌 것은 의미심장할 수밖에 없다. 평화주의자이자 친한파인 그의 생전 퇴위는 아베와 우익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개헌세력에 보내는 경고장으로 풀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왕을 앞세워 군국주의 시절의 향수를 달래려는 우익의 기도를 아키히토가 ‘자리’를 던지면서 거부한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현재 일본에는 일왕 양위에 관한 규정이 없다. 1889년 제정된 대일본제국헌법에 따른 구황실전범 10조는 일왕이 사망해야 황위를 계승한다고 명시, 양위 불가를 명문화했다. 당시 궁내성에서 만든 초안엔 양위 규정이 있었지만 총리였던 이토 히로부미가 이를 삭제했다고 한다. 일왕이 군국주의 세력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지 않고 자리를 내놓으며 항의하는 사태를 우려했을 가능성이 있다. 1947년 시행에 들어간 일본 평화헌법에 따른 황실전범에서도 ‘황위 승계를 덴노(天皇)의 사망 시에 한다’고 규정해 양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 법은 아키히토가 생전 양위 의향을 밝히면서 개정에 들어가게 됐다.

1 마지막으로 양위한 일왕 고카쿠.

1 마지막으로 양위한 일왕 고카쿠.

2 양위 뒤 불가에 귀의해 법황이 된 일왕 고시라카와.

2 양위 뒤 불가에 귀의해 법황이 된 일왕 고시라카와.

3 일왕 고미즈노오는 50년간 상황으로 권력을 휘둘렀다. [중앙포토]

3 일왕 고미즈노오는 50년간 상황으로 권력을 휘둘렀다. [중앙포토]

이토 히로부미, 일왕 저항 우려해 양위 규정 삭제

흥미로운 것은 아키히토를 비롯한 왕실이 일본 역사상 마지막으로 양위한 119대 고카쿠(光格, 1771~1840년, 재위 1780~1817년)의 직계후손이라는 사실이다. 고카쿠는 8촌인 118대 고모모조노(後桃園, 1758~1779, 재위 1771~1779)가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뒤를 이었으며 지금부터 딱 200년 전인 1817년 아들 닌코(仁孝, 1800~1846, 재위 1817~1846)에게 양위해 상황이 됐다. 지금까지 일본 역사상 마지막 양위다. 120대 닌코 이후 121대 고메이(孝明, 1831~1867, 재위 1846~1867), 122대 메이지(明治, 1852~1912, 재위 1867~1912), 123대 다이쇼(大正, 1879~1926, 재위 1912~1926), 124대 쇼와(昭和=히로히토, 1901~1989, 재위 1926~1989)를 거쳐 아키히토로 이어졌다.

일본 역사에서 양위는 흔했다. 125대에 걸친 역대 일왕 중 양위를 한 경우가 59건이나 된다. 왕위 계승을 순조롭게 하기 위해 권력이 강할 때 직계 후손에게 양위를 하는 경우가 상당수였다. 자식들에게 물려준 다음에도 자신은 상황에 앉아 섭정을 맡으며 실권을 계속 휘두를 수 있다. 힘이 달려 자리를 강제로 양위하는 경우도 있었다. 실세 권력에 불만을 나타내기 위해 자리를 내놓은 경우도 있었다. 불교 전래 뒤에는 재위 중 사망하면 자리를 오염시켜 후손들에게 불길하다고 여겨 양위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양위 뒤 태상천황(太上天皇), 즉 상황이라는 존호를 받고 권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일상적이었다. 상황이 머리를 깎고 불문에 귀의하면 법황(法皇)으로 불렸다. 권력 행사는 법황이 돼서도 중단하지 않았다.

양위, 고도의 정치행위이자 권력 투쟁 수단

도쿠가와(德川) 막부(幕府) 시대(1603~ 1868)의 일왕은 줄이어 양위했다. 108대 고미즈노오(後水尾, 1596~1680, 재위 1611~1629)는 막부의 쇼군에게 밀려 권위에 상처를 입자 양위했다. 막부에 불만을 표시하려는 의도였다는 분석도 있다. 그는 양위 뒤에도 상황(나중에는 불교 승려로 출가해 법황으로 불림)으로서 조정(일왕의 궁정)의 권력을 휘둘렀다. 부인이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의 딸이었으므로 막부도 말리지 못했다. 고미즈노오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후손 없이 세상을 떠난 경우를 빼고는 모두 양위가 이뤄져 상황이나 법황이 됐다.

일본 양위의 역사는 시작부터 권력 투쟁과 관련이 깊다. 1370여 년 전인 645년 여성 일왕인 35대 고교쿠(皇極, 594~661, 재위 642~645)가 남동생인 36대 쇼토쿠(孝德, 596~654, 재위 645~654)에게 자리를 물려준 것이 일본 역사상 첫 양위다. 고교쿠는 남편이자 숙부인 34대 조메이(舒明, 593~641, 재위 629~641)가 세상을 떠나면서 즉위했지만 야심만만한 아들 나카노오에(中大兄)가 권신들과 권력 투쟁을 벌이면서 개혁을 추진하자 실권을 주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일본에선 양위가 고도의 정치활동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역사는 잘 보여준다. 아키히토의 양위는 민주주의 시대 일본 군주의 역할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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