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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간 찍은 다큐멘터리, 소소한 일상의 힘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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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호 32면

2007년 5월 여정이 시작됐다. 10년간 전국 방방곡곡을 돌았다. 500여 곳의 삶의 현장을 다큐멘터리로 담아냈다. 다른 방송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한 장소를 사흘, 72시간 동안 밀착 기록한다는 데 있다. KBS의 장수방송 중 하나인 ‘다큐멘터리 3일’의 주인공은 여러 명이다. 딱 3일 찍지만, 장소를 오가는 사람의 이야기가 갈래갈래 담겨 내용이 풍성하다. 14일이면 500회를 맞는 방송의 평균 시청률은 8%대라고 한다. 수목 드라마 시청률 수준이다.

『사랑하면 보인다』 #저자: KBS ‘다큐멘터리 3일’ 제작팀 #출판사: 인플루엔셜 #가격: 1만5800원

방송을 거쳐 간 이도 숱하다. 67명의 PD, 24명의 작가, 78명의 VJ와 내레이션에 참여한 104명 등이다. 제작팀은 서문에서 방송의 인기를 이렇게 분석한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마주하게 되는 미디어 속 환상적인 이미지들. 그 속에서 어느새 우리의 소소한 일상의 모습을 음미하고 반추해볼 기회를 잃어버린 건 아닌지생각하게 한다.”

방송에서 소개한 장소 중 100곳을 추려내 책으로 담았다. 생동감을 더해준 영상이 빠진 대신 활자가 된 내레이션이 진득하게 이야기를 전달한다. 다시 열정을 불어넣는 곳, 말없이 위로해주는 곳, 언제나 가슴이 설레는 곳 등 10가지 테마로 장소를 분류해 소개했다. 어디든 길 위에서 땀 흘리며 삶을 일구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전남 광주의 ‘1913송정역시장’은 영화 ‘인턴’의 한국판 현장 같다. 열정 많은 30세 CEO가 경험 많은 70세 인턴을 만나 우정을 쌓으며 사업과 인생의 지혜를 배우게 된다는 내용의 영화처럼, 청년과 어르신이 합심해 낡은 시장을 살렸다. 1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시장은 2015년만 해도 55개의 점포 중 3분의 1이 비었다고 한다. 전통시장 활성화 프로젝트가 가동됐다. 청년들에게 저렴한 임대료로 점포를 내주자는 취지였다. 경쟁률은 7대 1이었다. 삼겹살을 한 쌈 씩 파는 고기 가게, 전라도 사투리를 제품 디자인에 활용한 문구점 등 청년 가게의 아이디어가 시장에 활기를 불러왔다. 여기에 자신이 살아온 옛 이야기들을 사진으로 걸어놓은 어르신 가게의 100년 역사가 맛깔 나게 버무려졌다. 평일 평균 2500여 명, 주말에는 5000여 명의 방문객이 시장을 찾는다고 한다.

서울 국립중앙도서관은 1945년 문을 열었다. 총 920만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다. 국내 최대 규모다. 매일 500~800권 정도의 신간도서가 들어온다고 한다. 이를 체계적으로 분류하는 일은 사서의 몫이다. 지하서고에 쌓여 있는 수백만권의 책은 대출 신청이 들어온 순간 거미줄처럼 연결된 레일을 통해 각 자료실로 배달된다. 1900년 이전에 만들어진 책을 볼 수 있는 고전자료실에는 어르신들이 많다. 며느리에게 족보를 찾아주려는 시아버지처럼 말이다. 과학실험실 같은 자료복원실은 훼손된 책을 복원하는 곳이다. 도서관에서 그냥 망가져도 좋은 책이란 없단다.

경남 남해섬에는 14개의 트레킹 코스가 있다. 일명 ‘바래길’이다. 바래는 갯벌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일을 일컫는다. 어머니들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바다 일터로 향하던 그 길을 찾아 연결했단다. 전남 장성 축령산에는 10㎞에 달하는 편백나무 숲길이 있다. 한국 전쟁 당시 벌거숭이에 가까웠던 산은 한 사람 덕에 아름다운 편백숲으로 가꿔졌다. 독립운동가 출신의 임종국 선생이 주인공이다. 그는 야산에서 자라는 편백을 보고 반해 사재를 털었다. 56년부터 20년간 280만 그루의 편백나무를 심었다. 오늘날 숲은 암환자들에게 치유의 숲으로 소문났다고 한다.

책을 방송 후 남은 기록물로 생각하기엔 아깝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면 어디든 쉽게 찾아갈 수 있는 디지털 시대 아니던가. 연둣빛 나뭇잎이 짙은 녹색으로 익어가는 봄날의 가이드북으로 적당하다. 인생 여행을 떠나는 길의 좋은 동무가 될 것 같다.

글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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