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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농담할 줄 아는 후보 없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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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고정애 라이팅에디터

고정애 라이팅에디터

뻔하디 뻔한 인물의 책을 꺼내 든 건 갈증 때문이었다.

“난 조물주를 만날 준비가 돼 있다네. 그가 나와 만나는 시련을 감당할 준비가 됐는지는 별개 문제지만.”

이런 말을 할 정도로 뻔뻔하지만 근면하고, 유치하면서도 천진난만하고, 친절하지만 잔인하고, 탐구적이면서도 고집 센, 충돌하는 품성의 소유자 윈스턴 처칠이다. 그의 짓궂은 유머가 담긴 책을 읽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0년 노르웨이 파병을 앞둔 영국 해병대를 위해 방한용 총구 보호대를 만들기로 했다. 제작은 콘돔 업체가 맡았다. 처칠은 시제품이 담긴 상자들을 보곤 연신 “이대론 안 되겠어”라고 중얼거렸다. 참모가 의아해하니 처칠이 설명했다. “라벨 말이야. 상자마다 ‘영국인. 사이즈: 중’이라고 써야 해. 나치가 보면 알겠지. 누가 지배민족인지 말이야.” 유세 중엔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신에게 투표하라고? 차라리 악마에게 하겠다.” 질색하는 유권자에게 넌지시 말했다. “당신 친구(악마)가 출마하지 않으면 나를 지지해 줄 거죠?”

그는 신랄하기도 했다. 보수당 의원들을 향해 “모두 존경할 만한 신사들이야. 소신을 위해 희생할 태세가 돼 있지. 물론 소신은 없어. 진실을 위해 죽을 각오도 돼 있어. 진실이 뭔지 모를 뿐이지”라고 했다. 때론 ‘자기 비하’적이었다. 40년 “해변·들판·거리 등에서 싸우겠다”는 취지의 항전 연설을 하는 도중 박수가 터지자 옆 사람에게 “비록 들고 싸울 게 깨진 맥주병뿐이겠지만”이라고 속삭였던 그다. 자신을 두고도, 마이애미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을 때 이같이 말했다. “이토록 적은 시험에 합격하고도 이토록 많은 학위를 받은 사람은 (나 말곤) 없을 게다.”

어디 처칠뿐이랴. 성공한 지도자들의 상당수는 유머 감각이 남달랐다. 시의적절한 유머를 통해 긍정 에너지를 전하곤 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나 존 F 케네디 등이다. ‘유머=지도자의 덕목’으로 여겨질 정도다.

세 차례 대선후보 TV토론을 봤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열의도, 적의도 분명했다. 내내 숨 막힐 듯 농밀했다. 엄중한 시기긴 하다. 그래도 너무 진지했다. 민주국가에서 선거는 기본적으로 축제 아닌가.

처칠은 정도 이상으로 긴 연설문을 두고 “농축하지 않은 건 순전히 게으름 탓”이라고 했다. 연설문을 유머로 바꾸어도 말은 통한다. 게으름만이 아닌 자신감·성의 없음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진정 듣고 싶다. 후보들의 농담을.

고정애 라이팅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