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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현금을 없애는 순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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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나현철
나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나현철 논설위원

나현철 논설위원

새벽에 스마트폰이 거듭 울려 잠을 깼다. 아들이 쓰는 체크카드 결제 문자 세 건이 연달아 와 있었다. ‘50원, 100원, 50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소액결제로 반응을 본 뒤 뭉칫돈을 빼가는 게 카드 해킹범들의 흔한 수법이다. 신고할까 하다가 대학 기숙사에 사는 아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방금 카드 썼니?’ 심드렁한 답이 왔다. ‘응. 왜?’ 알고 보니 ‘시험 준비 때문에 학교 복사기를 썼는데 장당 50원씩 카드로만 결제가 된다’는 거였다. 1년 전 이때 ‘동전이 필요없겠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사실 물건 살 때 동전을 쓴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안 난다. 카드 만능 시대가 도래한 덕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카드 결제금액은 ‘만 원 이상’이었다. 이게 ‘1000원 이상’이 되더니 지금은 최저금액이 사라졌다. 껌 한 통도 카드 결제가 당연한 세상이다. 현금 거래는 전체의 4분의 1로 쪼그라들었다. 거스름돈 동전을 받을 일도 그만큼 줄었다. 마트에 갈 때 동전을 챙기는 건 결제가 아니라 카트를 꺼내 쓰기 위해서다. 이러니 한국은행이 ‘동전 없는 사회’ 시범사업을 시작할 만도 하다. 지난 20일부터 전국 2만3000여 개 편의점과 마트에서 거스름돈을 카드 포인트로도 받을 수 있게 됐다. 세계 최고인 ICT(정보통신기술)와 카드 보급률 덕에 가능한 일이다.

‘현금 없는 사회’는 세계적 추세이기도 하다. 유럽중앙은행(ECB)은 2018년 말까지 500유로 지폐 발행을 중단키로 했다. 인도 모디 총리는 지난해 11월 500루피와 1000루피 지폐 발행과 사용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1년 뒤 신권을 재발행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믿지 않는 사람이 많다. 미국에서도 재무장관을 지낸 래리 서머스를 비롯한 일부 학자들이 100달러권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빌 게이츠와 씨티그룹도 이런 움직임을 후원한다.

두 흐름은 비슷하지만 큰 차이가 있다. ‘현금 없는 사회’로 가는 경로다. 한쪽은 동전을 먼저 없애고, 다른 쪽은 고액권을 먼저 건드린다. 장단점은 둘 다 있다. 동전은 액면가보다 발행 비용이 더 든다. 동전 사용이 줄면 한은엔 이익이다. 대신 노약자와 노점상, 신용불량자 같은 경제적 약자들이 불편해진다. 반대로 고액권을 없애면 테러 자금과 돈세탁을 추적하고 탈세를 막기 쉬워진다. 범죄자와 자산가, 지하경제가 위축된다. 결국 변화에 따르는 비용을 누구에게 먼저 물리느냐의 문제다. 치열하게 논쟁하고 고민해 볼 만한 주제다. 그럼에도 아무 논란이 없었다는 게 영 아쉽다.

나현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