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들이 눈물을 닦아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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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맞벌이 부모가 집을 비운 사이 9일 발생한 화재에 여자 아이 세 명이 속수무책으로 숨졌다.

일을 마치고 이날 밤 늦게 집으로 돌아온 아이들의 부모는 넋을 잃은 채 숨진 아이들의 이름만 부르고 있다. 안타까운 죽음을 접한 이웃 주민들은 십시일반으로 성금 모금에 나섰다.

◆ 화재신고 통화 내역 공개=강원도 영월소방서 측이 화재신고 당시 신고한 아이와 소방관 간의 통화 내역을 공개하면서 아이들이 숨지기 직전의 상황이 그대로 드러났다. 9일 오후 6시11분 영월소방서의 화재신고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7세 된 유모양이 "불이 났으니 빨리 구해달라"고 다급하게 구조를 요청했다. 유양은 여동생(4)과 함께 인근 서면 쌍용리의 친구 조모(7)양 집에 놀러 갔다 불이 나자 119 전화번호를 눌렀던 것이다. "불이 어디서 났느냐"는 소방관의 질문에 유양은 "신발장"이라고 대답했다. 이어 "빨리 오세요. 우리밖에 없어요. 애들 밖에요. 7살 둘"이라고 말했으나 전화가 끊어졌다.

이때만 하더라도 유양은 자신의 이름과 아버지 이름을 댈 수 있었다. 불이 집안 전체로 확산되지 않았던 것 같다고 소방서 측은 추정했다. 소방관은 유양에게 계속 말을 시키며 셋이 함께 집 밖으로 나갈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놀란 아이들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2분 뒤. 영월소방서에 유양의 두 번째 신고전화가 걸려왔다. 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로 두 차례나 "터지고 있어요"라고 외쳤다. 열기로 뜨거워진 전기제품 등이 폭발하는 소리였다.

화재신고가 접수된 뒤 즉각 출동한 소방차는 1㎞ 거리를 4분에 달려 6시15분에 도착했다. 그러나 유양 등은 질식해 숨진 채 발견됐다. 아이들의 시신은 영월과 제천의 병원에 각각 안치됐다.

◆ 부모는 모두 맞벌이=조사 결과 유양은 여동생과 어린이집이 끝난 후 조양의 집에 놀러 왔다가 참변을 당했다. 유양과 조양의 부모는 모두 맞벌이를 한다. 이날도 부모가 일을 하러 나간 사이에 화재가 발생했다. 불이 난 25평짜리 조립식 건물은 원래 조양의 아버지(41)가 동네 학원으로 사용하던 건물이었다. 학생이 줄자 주택으로 개조해 사용해 왔다. 학원은 충북 제천시로 옮긴 뒤 매일 출퇴근해 왔다는 것이다. 농사를 짓는 유양의 아버지(40)는 농한기를 맞아 부인과 같이 연탄배달을 나간 상태였다.

영월소방서 관계자는 "조양의 집이 조립식 패널 주택이어서 불길을 잡기가 어려웠다"고 말했다.

한 동네 주민은 "먹고 살기 위해 돈 벌러 간 부모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면서 "하지만 고통 속에 숨져갔을 아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 아프다"고 안타까워했다.

◆ 성금 걷는 이웃들=안타까운 소식이 알려지면서 마을 사람들이 성금 모금에 나섰다. 쌍룡리 주민협의회 등이 1000만원을, 김신의 영월군수가 400만원을 내는 등 화재 발생 하루 만에 1600만원의 성금이 걷혔다.

영월=이찬호 기자, 이철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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