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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준비하듯 도전 … ‘미스 사이공’ 세계무대 서는 무명 배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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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박영주

박영주

“2009년 배우 생활을 시작한 뒤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배우로서 제일 잘하지는 못했어도 제일 열심히 했다고요. 대학 입시 준비하듯이 살았으니까요.”

꿈의 무대 ‘웨스트엔드’ 진출, 박영주 #서울대 경영학과 나온 늦깎이 #여주인공 약혼자 투이 역에 캐스팅 #“무작정 찾아간 오디션에 합격 행운”

배우 박영주(33). 대학로 극장을 부지런히 찾아다니는 뮤지컬 매니어도 잘 모르는 이름이다. 스스로 무명배우라고 고백한 그가 세계 최고의 뮤지컬 무대인 영국 웨스트 엔드에 선다. 박씨는 “세계 최대 뮤지컬 제작사인 영국의 캐머런 매킨토시가 제작하는 뮤지컬 ‘미스 사이공’의 ‘투이’ 역 커버(주역 대신에 출연하는 배우)와 앙상블로 캐스팅됐다”고 소개했다.

‘미스 사이공’에서 투이는 여주인공 ‘킴’의 약혼자로 비극적 죽음을 맞는 베트남 장교다. 그래서 주로 동양 배우들이 연기한다. 2014년 국내 배우 최초로 웨스트 엔드에 진출한 홍광호도 투이 역할이었다. 물론 홍광호는 커버가 아니라 주역이었다.

박씨는 고작 커버다. 그래도 의미가 있다. 홍광호는 이미 한국에서 스타 배우였기 때문이다. 소속 기획사도 있다. 반면에 박씨는 앙상블·코러스 포함해 10편에 출연한 게 경력의 전부다. 더욱이 그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늦깎이 배우다.

뮤지컬 ‘미스 사이공’의 국내 공연 장면. [중앙포토]

뮤지컬 ‘미스 사이공’의 국내 공연 장면. [중앙포토]

“2008년 독일에서 교환학생으로 있을 때였어요. 런던으로 뮤지컬을 보러 갔다가 ‘오페라의 유령’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이란 출신 배우 라만 카림루의 유령 연기에 완전히 빠졌거든요. 제 심장을 뛰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그때 알았어요. 그때까지 저는 열심히 살기는 했어도 정말로 하고 싶은 건 없었어요.”

그날 이후 박씨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2009년부터 대학로 무대에 서면서 틈틈이 연기와 춤을 연습했다. 충남 당진에서 농약 가게를 하는 부모도 처음에는 반대가 심했지만 아들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지난해 초 오스트리아로 뮤지컬 유학을 떠났고 그해 9월 런던에서 오디션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작정 찾아갔어요. 1·2차 심사가 있었는데 1차 노래 심사에서 15초 만에 노래를 끊었어요. 2차를 준비하라고 하더라고요. 2차 춤 심사 때는 연기도 했어요. 오디션 분위기가 좋아서 기대했는데 6개월 만에 합격 통보가 왔어요.”

투이는 진성으로 3옥타브 이상 소화해야하는 배역이다. 박씨는 “아버지로부터 노래 실력을 물려받았다”며 웃었다. 합덕성당에서 성가대 활동을 한 아버지를 따라 성당에서 노래 부르고 기타 치던 ‘성당 오빠’였다. 배우가 돼서는 선배 배우인 아내 김송이(37)씨의 도움이 컸다. “춤·음악·연기 모두 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죽을 때까지 단련해야겠지요. 영어도 잘 못합니다. 어린 배우들과 경쟁하는 것도 부담스럽고요. 그래도 자신 있습니다. 세계적인 배우도 작은 역할부터 시작했잖아요? 제가 잘하는 게 열심히 하는 거잖아요.”

‘미스 사이공’은 7월부터 내년 말까지 영국에서 순회 공연한다. 현재 일본에서 활동 중인 한국 배우 김수하(23)가 킴으로 출연한다. 박씨는 다음달 11일 출국할 예정이다.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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