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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들어간 그라피티 킹 셰퍼드 페어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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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남동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에서 디제잉 공연을 펼친 그라피티 아티스트 셰퍼드 페어리. [사진 현대카드]

서울 한남동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에서 디제잉 공연을 펼친 그라피티 아티스트 셰퍼드 페어리. [사진 현대카드]

거리 예술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그라피티 아티스트 셰퍼드 페어리(47)는 그 질문과 답을 동시에 던지는 예술가다. 그는 1989년 로드아일랜드디자인스쿨(RISD) 재학 당시 장난삼아 만든, 거인병을 앓았던 프랑스의 전설적인 프로레슬러 앙드레 더 자이언트 이미지와 ‘복종하라(OBEY)’는 단어를 결합한 스티커와 포스터를 거리 곳곳에 붙이고 다녔다. 해당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노출되자 “대체 무엇에 복종하란 말인가”라며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보고 그는 거리예술의 힘을 실감했다.

서울 예술의전당서 그룹전 이어 개인전 열려 #첫 방한해 '평화와 정의' 대형 벽화 작업 나서 #89년 "복종하라" 캠페인으로 유명세 타기 시작 #오바마 '희망' 이어 반 트럼프 포스터도 인기

이후 30여년 간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져갔다. 2008년 미 대선 때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희망(HOPE)’ 포스터를 만들었고, 지난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반이민정책 등 백인우월주의가 가시화되자 ‘우리가 국민(We the People)’ 캠페인을 시작했다. 무슬림 히스패닉 흑인 여성 이미지를 통해 미국 내에 다양한 국민이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성조기로 만든 히잡을 쓰고 있는 무슬림 여성을 형상화한 '우리가 국민' 포스터. [사진 셰퍼드 페어리]

성조기로 만든 히잡을 쓰고 있는 무슬림 여성을 형상화한 '우리가 국민' 포스터. [사진 셰퍼드 페어리]

그런 그가 이번엔 한국을 찾았다.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이달 30일까지 열리고 있는 ‘위대한 낙서 셰퍼드페어리전: 평화와 정의’ 전시에 맞춰 예술의전당 내 서울서예박물관 벽면에 대형 벽화 작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다. 이는 지난해 12월부터 넉달간 열린 그라피티 아티스트 7인의 단체전 ‘위대한 낙서’의 폭발적인 반응으로 기획된 후속 전시기도 하다.

또 이를 축하하기 위해 11일 서울 한남동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에서는 큐레이티드 공연이 열렸다. 큐레이터 겸 호스트로 나선 윤종신은 “그라피티에 관심이 많아 존 원과 함께 월간 윤종신 작업을 하다가 페어리와 연이 닿았다”며 “오랜 팬으로서 훌륭한 아티스트를 소개할 수 있어 영광”이라고 말했다. 이에 페어리가 수년간 갈고 닦은 디제잉 실력으로 응수하며 공연장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공연 시작 전에 그를 만났다.

거리에 붙어있는 오베이 포스터. [사진 미노아아트에셋]

거리에 붙어있는 오베이 포스터. [사진 미노아아트에셋]

- 한국 방문은 처음이다.
“원래는 일정이 꽉 차서 계획에 없었는데 전시 반응이 워낙 좋다고 해서 갑작스레 오게 됐다. 전시장을 둘러보니 메이킹 영상이 곳곳에 배치돼 있는 점이 눈에 띄었다. 원래 거리에 있던 작품들의 제작과정을 보여줌으써 관람객들이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다.

- 뉴욕현대미술관ㆍ스미소니언 박물관 등에도 작품이 영구소장돼 있는데.
“미술관도 거리도 모두 소중하다. 메시지가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닿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시가 열릴 때면 주제에 맞춰 거리 캠페인 콘셉트도 통일시키는 편이다.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도록.”

- 이번 전시 주제는 직접 정한 건가.
“평화와 정의는 내게 줄곧 중요한 화두였다. 그간의 작업들을 연결하는 키워드기도 하다. 최근 미국과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정치 문제가 주요 이슈로 떠오르면서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대형 벽화 역시 같은 주제로 진행하고 있다. 한 여성이 평화와 정의를 상징하는 아이콘들을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이다. 부인이 모델이다.”

- 부인이 종종 작품에 등장한다.
“그녀는 일본ㆍ멕시코ㆍ아일랜드ㆍ스페인 혼혈로 국제적인 인물을 표현하기에 매우 적합하다. 하하.”

- 아이디어는 주로 어디서 얻나.
“현재 발생하고 있는 이슈가 중요하게 때문에 뉴스고 책이고 닥치는대로 읽는다. 역사서도 좋아한다. 수집광이기도 하고. 세상이 많이 변한 것 같지만, 의외로 사람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과거에서 힌트를 많이 얻을 수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희망'을 연결해 페어리가 만든 포스터. [사진 미노아아트에셋]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희망'을 연결해 페어리가 만든 포스터. [사진 미노아아트에셋]

- 이미지로 만들 때 본인만의 규칙이 있다면.
“글쓰는 걸 좋아하지만 가급적 언어 사용을 자제하려고 한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이 봐도 단번에 이해할 수 있길 원하기 때문이다.”

- 체포당한 적도 여러 번인데 안 걸리는 노하우는 없나.
“정확히 18번이다. 작품이 유명해질수록 그들은 나를 더 잡아넣고 싶어한다. 트로피가 되니까. 경찰을 그리지 않는다거나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있겠지만 타협하고 싶진 않다.”

벽화 작업을 하고 있는 셰퍼드 페어리의 모습. [사진 미노아아트에셋]

벽화 작업을 하고 있는 셰퍼드 페어리의 모습. [사진 미노아아트에셋]

페어리는 자연스레 몸을 흔들며 그루브를 타다가도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하염없이 진지해졌다. 아예 ‘오베이’ 브랜드를 만들어 이미지마다 엽서ㆍ소품ㆍ의류 등 굿즈를 만들어 판매하는 그에게 “지나치게 상업적”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그의 중심은 분명했다. “이건 그냥 스티커에 불과해요. 하지만 사람들이 반응하고 움직이면 캠페인이 되는 거지요."


사진 촬영을 요청하는 팬들을 만날 때마다 기꺼이 응한 뒤 스티커를 건네던 그는 다음 작업 주제는 기후 변화를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 내에서는 ‘우리가 국민’이 당면한 문제지만 기후변화는 모두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잖아요. 인권도 그렇고. 서울이나 도쿄는 너무 깨끗해서 그라피티를 찾아보긴 힘들지만 얼마든지 다른 형식으로 동참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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