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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녀는 왜 “죽고 싶다”고 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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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4월의 존재를 일깨워주는 것들이 있다. 가로수에 구름처럼 피어난 꽃들, 라디오에 흐르는 “벚꽃엔딩,” 그리고 뉴스매체마다 나오는 수사

“잔인한 4월.”

사실 세계는 언제나 가혹해서, 참담한 일들은 달을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서 일어난다. 하지만 다른 어느 때보다도, 봄이 반짝이는 꽃망울을 찬란히 터뜨리기 시작하는 이 때, 예민한 이들은 그 무심한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황홀해하면서도 원망스러워하나 보다. 18세기 일본 시인 고바야시 잇사가 "그럴 가치도 없는 세상, 도처에 벚꽃이 피었네."라고 탄식했듯.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20세기 영국 시인 T. S. 엘리엇이 장시(長詩) ’황무지’에서 말한 건 사실 좀 다른 맥락이었다. 하지만 연관성도 없지 않다. 곧이어 이런 시구가 나온다. “겨울은 대지를 망각의 눈(雪)으로 덮어 우리를 따뜻이 해주었다.” 그렇게 모든 일들에 눈을 감은 채 당장의 욕구만 습관적으로 채우며 ‘삶 속의 죽음(Death in Life)’ 상태를 살고 있었는데, 4월이 그 생명력 넘치는 “봄비로 잠든 뿌리를 흔들어” 고통 섞인 각성을 불러일으키니 잔인하다는 것이다.

‘황무지’는 총 5부 434행으로 돼있고 다양한 신화전설과 기존 문학작품 모티프를 새로운 맥락에서 인용하고 있어서, 읽는 이가 걸어다니는 도서관이 아닌 이상 바로 이해하기 힘들고, 중간에 시집을 던져버리지 않으려면 무한한 인내가 필요하다. 하지만 단순무식하게 요약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살아도 죽은 상태로 어정쩡하게 있지 말고 아예 죽으라. 그럼으로써 부활하라.’

이게 명확히 드러나는 건 ‘황무지’의 에피그라프(서구문학의 전통으로서 글 첫머리에 글 내용을 암시하는 속담, 경구, 고전문학 인용문 등을 붙인 것)인 고대 로마 풍자소설 『사티리콘』의 한 구절이다. “나는 쿠마에(이탈리아의 한 지명)의 무녀가 항아리 속에 달려 있는 것을 내 눈으로 봤습니다. 아이들이 무녀에게 ‘무엇을 원하냐’고 물으니 그는 ‘죽고 싶다’고 하더군요.”

아도니스의 죽음을 비탄하는 베누스 (1768), 벤자민 웨스트(1738-1820) 작

아도니스의 죽음을 비탄하는 베누스 (1768), 벤자민 웨스트(1738-1820) 작

그 무녀는 젊었을 때 태양신에게 불사(不死)에 가까운 장수를 기원해서 얻어냈지만 불로(不老)를 기원하는 건 그만 잊어버렸다. 그래서 한없이 늙어가면서 죽지는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종국에는 몸이 쪼그라들어 항아리에 들어갈 정도였다고 한다. 살았지만 죽은 것과 같은 상태인 것이다. 따라서 무녀의 염원은 진짜로 죽는 것이었다. 죽어야만 재생의 희망이 있기에.


‘황무지’는 또 엘리엇이 말한 대로 신화인류학자 제임스 프레이저의 아도니스 신화 해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아도니스는 사랑과 미와 풍요의 여신 베누스의 총애를 받는 미소년이었는데, 어느 날 사냥 중에 멧돼지에 받쳐 죽고 말았다. 여신의 슬픔이 너무 컸기 때문에 저승의 신들이 아도니스가 1년의 반은 저승에서 지내고 반은 이승에서 베누스와 지내도록 해주었다.

프레이저에 따르면 저승과 이승을 왕복하는 아도니스는 매년 겨울에 죽었다가 봄이면 소생하는 식물과 곡물의 상징이며 일종의 신이다. 이와 비슷한 신들의 신화가 고대 이집트와 서아시아에도 존재했다. 고대인들은 그들의 죽음과 부활을 재현하는 의식을 함으로써 대지의 풍요를 기원했다는 것이다.

왜 연속적인 영생이 아니고 극단적인 죽음과 부활일까? 죽음이 정화(淨化)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신이 죽을 때 불모와 재해와 죄악 같은 모든 나쁜 것들을 짊어지고 죽는다. 그래서 신의 죽음으로 세계는 정화되고, 신의 부활과 함께 새로운 풍요가 찾아온다. 곧 다가오는 그리스도교의 부활절도 연상되는 부분이다, 대지의 풍요와 영적 구원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그래서인지 아도니스의 시신을 잡고 비탄에 빠진 베누스를 그린 18세기 미국 화가 벤자민 웨스트의 그림(사진)은 묘하게 피에타의 도상을 닮았다.

엘리엇은 ‘황무지’에서 부활을 위해 죽어야만 한다는 것에 주목했다. 정신적으로 반쯤 죽은 채 계속 살아가는 것은 쿠마에 무녀의 쪼그라드는 삶과 다를 바 없다. 정신의 완전한 죽음과 부활은 결국 극도의 고통을 동반한 성찰과 기존 패러다임의 전복을 말하는 것이리라. 지금 우리 개인에게도 또 사회에게도 그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어느 원로 경제관료가 말한 대로 지금의 정치상황은 혼란스럽지만 낡은 시스템을 바꿀 국가의 좋은 기회일 수 있다. 그러나 진영논리에 기반한 개혁의 외침은 그것 또한 개혁의 대상일 뿐이다. 부활을 위한 죽음은 자기 자신부터 죽이는 근본적인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부활을 위해 엘리엇의 ‘황무지’ 마지막 부분이 말한 고대 인도의 철학서 우파니샤드의 진언(眞言)도 기억하자. “다타(Datta 베풀라),” “다야드밤(Dayadhvam 교감하라),” “담야타(Damyata 자제하라).”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