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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의없다’는 덕목, 국가 간에는 통하지 않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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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수정
김수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수정외교안보 선임기자

김수정외교안보 선임기자

서울에 주재하는 각국 외교관이나 본부의 한국 담당 외교관들에게 대목장이 섰다. 한국의 조기 대선, 북핵·미사일의 긴장 고조 속에 미·중이 일합을 겨루면서 생긴 큰 장이다. 안테나를 여기저기에 꽂고 누가 승리할지, 자국과의 현안은 어떻게 풀려고 하는지 정보를 얻고 미래 정부 인사들과의 네트워크 구축에 나선다. 부산의 총영사관 앞 소녀상 설치에 반발해 일본으로 돌아갔던 나가미네 야스마사 대사가 85일 만인 지난 4일 귀임한 것도, 북핵 문제를 다루는 조셉 윤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지난달 20~23일 한국을 다녀가고, 우다웨이 중국 외교부 한반도사무특별대표가 오는 10일 방한하기로 한 것도 다 그런 배경이 깔려 있다.

미·중·일 국장급 인사가 대선후보 만나는 현실 #외교에서 격 따지는 건 국격과 국민 자존심 문제

그런데 대한민국 국정 컨트롤타워의 부재란 상황이 이들의 눈엔 ‘쉬운 한국’으로 보였을까. 외교적 결례 논란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지난 4일 김포공항을 통해 귀임한 나가미네 대사는 도착 일성으로 “즉시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을 만나 한·일 합의(위안부 문제) 준수를 촉구하겠다”고 하더니, 그 다음날로 외교·통일·국방장관에게 줄줄이 면담 신청을 했다. 일본 출국 전 미리 기자들에게 ‘면담 계획’을 알렸다고 한다. 상대국과 사전 합의 전에 국가원수 대행, 주요 장관들과의 면담 요청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힌 건 국가 간 범절에 어긋난다.

외교 의전에서 회담의 격(格)과 형식은 기본 중 기본이다. 나라와 나라가 격을 맞춤으로써 서로를 존중하는 일이어서다. 외교 결례 비판이 일면서 정부는 6일 차관급인 김규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과의 일본대사 면담만 허용했다.

열흘 전엔 미국의 조셉 윤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방한, 북핵 협의 외 활동을 하면서 논란을 불렀다. 국장과 차관보 중간쯤 직급인 그는 당시 더불어민주당 안희정, 바른정당 유승민 경선 후보를 만나고 국민의당 박지원 대표와 회동했다. 고위 외교관 출신인 이현주 동북아역사재단 사무총장은 페이스북에 “미국이 아무리 최강국이고 동맹국이라고 해도 우리 외교부의 국장급도 안 되는 관리가 대선후보들을 만나며 휘젓고 다녔다. 이게 우리의 슬픈 현실”이라고 비판했다.

어수선한 정국에서 결례의 압권은 중국의 천하이 외교부 아주국 부국장의 지난해 말 행보다.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와 관련해 민감한 시점이라 정부는 “나중에 왔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그는 4박5일간 한국의 정·재계를 휘젓고 다녔다. 사드와 관련해선 “소국이 대국에 대항해서야 되겠나” “사드 배치 시 단교 수준의 엄청난 고통을 주겠다”고 겁박했다. 21세기 국제사회에서 상식을 갖춘 나라끼리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40대의 부국장급 인사를 당시 재계 고위 인사는 물론 여의도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다 만나줬다.

외교가에선 “국민의 대표라며 부처 장차관들을 부하 다루듯 하는 정치인들이 중국의 부국장을 공식 카운터파트로 만나주는 건 말이 안 된다”는 비판이 나왔다. 한 외교관은 “역사에 남을 일”이라고 했다.

우리에겐 익숙하지만, 대통령 당선인이 한국 주재 4강(미·일·중·러) 대사를 초청하는 행사도 외국에선 찾기 힘든 경우다. 당선인은 국가원수다. 해외에 나가 있는 한국의 대사들이 주재국 대통령을 단독으로 만났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신임장을 낼 때나 양국 정상회담 시 배석해 주재국 국가원수를 만나는 게 대부분이다. 새 정부의 외교정책 브리핑과 양국 간 협력 증진 당부는 외교 장차관을 통해 하면 되고, 개인적으로 친한 사이면 비공식적인 자리를 가지면 그만이다.

서울에서 열리는 중국의 국경절 행사에 전직 총리부터 재계 고위 인사까지 800여 명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풍경도 말해 무엇하랴. 우리는 격의 없이 어울리는 사람의 인성을 ‘덕목’의 범주에 넣는다. 하지만 국가끼리는 아니다. 격을 따지는 건, 친미냐 반미냐, 친중이냐 반중이냐, 친일이냐 반일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국격의 문제, 국민 자존심의 문제다. 천하이 같은 외교관이 우리 정·재계를 ‘휘젓고’ 다니게 만든 건 우리 책임이다. 오는 10일 우다웨이 대표의 방한길에 천하이 부국장이 동행한다고 한다. 그가 또다시 우리 외교의 자존심을 훼손하는지, 누가 그 옆에 기대어 사진을 찍는지 지켜볼 참이다.

김수정 외교안보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