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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중국파 홍콩 신임 행정수반 “민주보다 쉬운 과제부터 시작을”

중앙일보

입력

친(親)중국계 캐리 람(林鄭月娥·60) 전 홍콩 정무사장(총리 격)이 제5대 홍콩 행정장관에 당선됐다.

람 당선인은 간접선거로 치러진 26일 선거에서 777표를 얻어 365표에 그친 존 창(曾俊華·65) 전 재정사장(재정장관)을 압도적인 표차로 눌렀다. 5년 전 량전잉(梁振英) 현 장관이 얻은 689표보다 88표 많은 압승이다. 또 다른 후보인 후궈싱(胡國興·70)은 21표(1.8%)를 얻는 데 그쳤다.

26일 5대 홍콩행정장관 개표가 이뤄진 홍콩컨벤션센터에서 캐리람(사진 오른쪽)의 당선이 발표되는 순간 우산을 펼쳐 친중파 인사의 당선에 항의하고 있다. 2014년 홍콩에서는 직접선거를 요구하는 우산시위가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홍콩=AP·뉴시스]

26일 5대 홍콩행정장관 개표가 이뤄진 홍콩컨벤션센터에서 캐리람(사진 오른쪽)의 당선이 발표되는 순간 우산을 펼쳐 친중파 인사의 당선에 항의하고 있다. 2014년 홍콩에서는 직접선거를 요구하는 우산시위가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홍콩=AP·뉴시스]

이날 선거에는 선거인단 1194명 중 99.9%인 1186명이 투표에 참여했고 무효표는 23표로 집계됐다.

람 당선인은 이날 당선 소감에서 “갈라진 사회를 치유하고 전진을 위해 사회를 통합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홍콩에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원하지만 홍콩은 지금 더 큰 문제에 직면해 있다. 보다 쉬운 과제부터 시작하면 어떤가”라고 말했다.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중국 당국은 웃고 홍콩 시민들은 즉각 반발하며 중국의 선거 개입을 비판하는 반중 시위를 벌였다.

2014년 우산혁명의 주역인 조슈아 웡 데모시스토(香港衆志)당 비서장은 CNN에 “(캐리 람은) 홍콩인이 아닌 시진핑 주석에 의해 선택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중국은 람 당선인의 승리를 환영했다. 중국 국무원 홍콩·마카오사무판공실은 이날 오후 성명을 내고 “선거는 홍콩기본법 등에 따라 진행됐으며 선거 과정은 공평했고 평온하고 질서 있었다”고 평가했다.

지난 20일 발표된 시민 6만5000명이 참여한 모의투표에서는 창이 91.9%라는 압도적 지지를 얻었다. 람의 지지율은 1.5%에 불과했다. 하지만 람에겐 베이징 정부가 있었다. 중국 당국은 일찌감치 그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고 그를 후보로 추천한 선거인단은 579명이나 됐다. 람이 당 중앙의 지지를 받은 것은 2014년 직선제를 요구하는 민주화운동인 ‘우산혁명’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당시 그는 강경 대응으로 일관해 학생 시위대의 자진 해산을 이끌어 내면서 중국 정부의 신임을 얻었다. 이런 람의 승리에 대해 “상처 투성이의 승리”라는 평가도 나온다. 시민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람이 취임하는 오는 7월 홍콩에서 우산혁명 같은 대규모 반중국 시위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이날도 홍콩 도심에선 수백 명이 모여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전날에도 범민주파 시민단체인 민간인권진선(民間人權陣線)은 1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베이징 당국의 홍콩 선거 개입을 반대하는 시위를 했다. 시위대는 “우리 정부는 스스로 결정한다”고 외치며 행진을 벌였다.

피터 청 홍콩대 정치학과 교수는 본지에 “이번 선거는 선거인단이나 홍콩인의 관점에 상관없이 중앙의 영향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또 “현재 홍콩의 정치ㆍ경제적 모순은 모두 해결이 쉽지 않다”며 “신임 장관은 우선 시민의 지지를 얻는 게 급선무”라고 말했다.

시민사회의 반발에는 한계가 분명하다는 평가가 많다. 김진호 단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친중파를 중용하는 행정 장악, 지분 확보와 인적 교체를 통한 언론 장악은 물론 투자·여행객을 통한 경제 수단까지 이용한 중국의 홍콩 접수는 이미 완성 단계”라며 “반환 20년 만에 상대적 빈곤감에 빠진 홍콩 서민이 시위로 반발을 표시하겠지만 통제 가능한 수준에 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홍콩에서는 이미 비관론이 팽배하다. “홍콩 독립 세력은 퇴조했으며 홍콩의 과격 정치의 시대도 끝났다”는 평가도 나왔다. 홍콩 시사 주간지 아주주간은 최신호에서 “폭력 노선은 대내적으로 홍콩의 평화와 안정·번영을 파괴해 홍콩의 이익에 배치된다는 평가가 내려졌으며, 대외적으로 홍콩 독립의 최대 지원 세력인 영국과 미국이 국가 이익과 위배된다는 평가를 내렸다”고 분석했다. 이어 “홍콩 독립 세력의 이론적 기반이었던 ‘중국 붕괴론’의 설득력이 떨어진 영향”이라고 덧붙였다.
피터 청 교수는 홍콩 독립 세력에 대해 “홍콩 독립 세력은 이미 극소수”라고 전제하고 “중앙과 홍콩 온건파는 일국양제 아래 홍콩의 고도자치를 더 이상 중시하지 않고 있는 데 대해 절망감을 느낀 일부가 극단적인 행동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람 당선인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는 경제 회복이다. 홍창표 홍콩무역관 관장은 “람 당선인은 중국의 일대일로(육·해상 실크로드) 건설에 수반한 회계·물류 서비스 제공과 연구개발(R&D) 확대로 현 2%대의 저성장을 탈피할 돌파구를 찾으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우산혁명 이후 감소한 유커(旅客·중국인 여행객)로 인한 내수 대책도 지적했다. 홍 관장은 “홍콩 소매시장의 35%를 구성하는 유커 경제를 만회하기 위해 관광객 다변화와 보조금 확대 정책을 펼치고 있다”면서도 “90년대 중반 20%에 머물던 중국인 관광객 비중이 지난해 75%로 급증한 데 대한 ‘정상화’ 과정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고 말했다.

선거 직전 불거진 시진핑(習近平) 주석과 홍콩 업무를 책임지는 장더장(張德江)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위원장 사이의 갈등설도 어떻게 봉합될 지 주목된다. 선거 직전 홍콩 일각에서는 시 주석이 ^홍콩의 안정 우선, ^선거인단의 비밀투표 보장, ^중앙 지명설 부인 ^장샤오밍(張曉明·54) 현 홍콩연락판공실(중련판) 주임은 중앙의 대표가 아니라는 지침이 선거인단에게 전달됐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시 주석의 오랜 근무지였던 푸젠(福建)성 정법위서기였던 천둥(陳冬·54)이 지난달 말 홍콩 중련부 부주임으로 부임하면서 홍콩 선거를 둘러싼 시-장 갈등설이 힘을 얻기도 했다. 시 주석은 람 당선인의 임기가 시작되는 7월 1일 홍콩 반환 20주년에 맞춰 취임 후 처음 홍콩을 방문해 홍콩 주둔 인민해방군을 열병하고 기념식에 참석할 예정이다.
베이징=신경진 특파원 shin.kyung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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