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그 태생부터 자기 반영적이다. ‘최초의 영화’라고 불리는 ‘기차의 도착’(1895, 오귀스트 뤼미에르·루이 뤼미에르 감독)을 보면, 어떤 행위를 연기하고 다시 그것을 확인하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여럿 등장한다. 마치 거울을 보듯 스크린에 자신의 모습이 영사되는 즐거움, 말 그대로 자기 반영성이 영화의 오락성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의미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점에서 모든 영화는 감독의 자기 반영적 결과물이며 또 아니기도 하다. 예컨대 자기 반영적 연출로 유명한 잉마르 베리만(1918~2007) 감독은, 아예 영화를 자기 탐구의 매개로 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고작 자기 자신을 탐구한 작품이 왜 영화사에 긴요한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매우 좁고 예민한 대상 안에, 인간의 보편적 갈등과 고뇌와 모순을 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영화를 통해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은 것은 일반적인 인간의 본질이기도 하다.
대개 창작자들은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창작의 길에 들어선다. 그만큼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자기 이야기를 쓰다 보면, 그것이 대단히 새롭거나 놀랍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굉장히 기이하거나 고통스럽게 여겼던 일도, 작품으로 만들고 나서 보면 그저 그런 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같은 사건이라도 내 일은 크게 생각되고 남 일은 사소하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사실 창작의 세계에서 그것이 진짜 자신의 이야기인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그 일을 겪지 않은 사람까지도 작품을 통해 ‘내 일’처럼 공감하고 동일시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말의 세계에서는 그것을 ‘설득의 기술’이라 부른다. 하지만 허구의 서사 세계에서는 그럴듯함, 즉 ‘개연성의 문제’로 받아들여도 좋을 듯하다. 그 영화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럴 만하구나, 그럴 수 있겠구나’ 하고 동의하게 만드는 것, 그것은 고백의 진정성이 아니라 설계의 미학성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한다고 해서 그 자체로 설득의 기술을 갖추는 것은 아니다.
글=강유정 영화평론가, 강남대학교 교수, 허구 없는 삶은 가난하다고 믿는 서사 신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