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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오선지에 내뱉는 시, 그게 힙합이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힙합의 시학
애덤 브래들리 지음
김봉현·김경주 옮김
글항아리
300쪽, 1만4000원


힙합은 여러모로 억울한 음악이다. 알만한 이들은 “거칠다”고 싫어하고, 고매한 분들은 “허세”라고 저어하는 그야말로 공격받기 딱 좋은 장르다. 하면 이건 어떤가. “기본적으로 모든 랩 음악은 공연되길 기다리는 한 편의 시와 같다.”(13쪽) 거기에 하버드대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고 콜로라도대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의 주장이라면 구미가 조금 당기지 않나.

‘랩은 곧 시’라는 전제를 받아들이고 나면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저자의 이론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오선지 대신 원고지 위에 펼쳐진 구절을 보고 있노라면 ‘줄바꿈’을 만난 시가 어떻게 산문과 구분된 길을 걸어왔고, 여백을 긍정하고 비트와 보조를 맞춰온 랩이 시와 무엇이 같고 다른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절로 와 닿는 구석이 있다. 분명 리듬을 품지 않은 글이건만 입으로 중얼대다 보면 라임이 살아나고 고개를 까딱거리게 되는 것이 그 방증이다.

힙합의 랩은 ‘길거리의 시(詩)’라고 불린다. 사진은 JTBC ‘힙합의 민족’의 한 장면. [중앙포토]

힙합의 랩은 ‘길거리의 시(詩)’라고 불린다. 사진은 JTBC ‘힙합의 민족’의 한 장면. [중앙포토]

랩의 라임을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성경 구절 등 다양한 예를 든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는 ‘베드로(Petros)’와 ‘반석(petra)’이 나란히 대구를 이룬다. 동음이의어 ‘불꽃(fire)’과 ‘해고하다(fire)’는 물론 동음이철어 ‘납(led)’과 ‘이끌다(lead)’를 활용한 라임은 힙합에선 흔한 용례다. ‘차이나 화이트(China White·헤로인)’로 시작해 ‘화이트 차이나(White China·그릇)’, ‘메이드 인 차이나’로 이어지면서 매번 다른 의미를 갖는 환의 역시 랩에 자주 쓰인다. 두운·각운은 기본이고 이제는 중간 운이 대세다.

그렇다면 왜 굳이 직설적이고 거칠어야만 하냐고? 그건 힙합이 직유의 미학이요, 대결의 정신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스웨거(Swagger)’의 뿌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전통인 ‘설전(signifying)’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의례적 모욕을 주고 받는 게임에서 침착함을 잃지 않고 창의성을 발휘하는 사람이 승리하는 언어적 관습이 음악에 녹아든 것이다. 작사를 하든, 프리스타일 랩을 하든 청자를 상정한 화법이다. T.S.엘리엇 식으로 말하면 “시인이 관객을 향해 말을 거는 목소리”인 셈이다. 당연히 은유보다는 ‘~처럼’, ‘~같은’ 직유가 효과적일 수밖에 없다.

[S BOX] 래퍼들은 왜 ‘브루클린’ ‘퀸스 브리지’를 외칠까

래퍼들은 왜 하나같이 ‘브루클린’이니 ‘퀸스 브리지’니 하는 지역명을 외칠까. 이는 뉴욕 자치구민들 사이에 퍼져있는 경쟁의식에서 기인한다. 1970년대 자메이카에서 사우스 브롱크스로 이민 온 DJ 쿨 허크가 랩을 시작한 이래 랩의 무게중심이 동부 뉴욕에서 서부 LA, 중부 애틀랜타로 이동하기까지 이들의 출신지역은 곧 신념과 스타일을 말해주는 징표가 됐다. “나는 어디에서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자서전적 근원과도 상통하는 부분이다.

나로 시작해 나를 드러내며 나에 집착하는 나르시시즘 특성은 되려 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진실되게 만드는 힘이기도 하다. 흑인 빈민가에서 태어나 성폭행 혐의로 수감중에 만든 투팍의 랩, 홀어머니 밑에서 돈을 벌기 위해 힙합에 뛰어든 제이 지의 랩은 절대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가수들이 하는 노래를 ‘본인 얘기’라고 믿는 사람이 없는 반면, 래퍼들의 이야기는 ‘진짜’라는 믿음도 여기서 나온 듯 하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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