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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탐사 성공 뒤에 숨은 인물, 흑인 여성 수학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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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1960년대 흑인 여성들의 유리천장 뚫기를 그린 영화 ‘히든 피겨스’의 세 주인공. 자넬 모네, 타라지 P 헨슨, 옥타비아 스펜서(왼쪽부터). [사진 이십세기폭스 코리아]

1960년대 흑인 여성들의 유리천장 뚫기를 그린 영화 ‘히든 피겨스’의 세 주인공.자넬 모네, 타라지 P 헨슨, 옥타비아 스펜서(왼쪽부터). [사진 이십세기폭스 코리아]

페미니즘이 강타한 한국사회에 절묘한 타이밍으로 도착한 영화가 있다. 미셸 오바마 전 미국 퍼스트레이디가 격찬하며, 지난 연말 백악관 시사회를 연 ‘히든 피겨스’(원제 Hidden figures, 23일 개봉, 데오도르 멜피 감독)다. 1960년대 NASA(미국 항공우주국)에 흑인 여성 수학자들이 있었고 이들이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게 영화의 핵심 내용이다. 달 착륙만큼이나 불가능해 보이는 흑인 여성들의 유리 천장 뚫기 프로젝트. 영화는 이 기적의 실화를 리드미컬한 흑인 음악에 맞춰 경쾌하게 풀어놨다. OECD 국가 중 여전히 남녀 임금 격차 1위인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히든 피겨스’를 놓쳐서는 안 되는 이유 네 가지다.


역사가 외면한 여성 영웅

실화 소재 ‘히든 피겨스’ 23일 개봉 #갖은 차별 딛고 NASA에서 활약 #우주선 궤도 계산할 수학 공식 발견 #반 세기 만에 공로 인정, 훈장 받은 #캐서린 존슨 등의 인간 승리 그려

흔히 ‘우주 탐사’하면 닐 암스트롱(1930~2012) 같은 백인 남성 우주비행사를 떠올리지만, 그 뒤에는 ‘흑인 컴퓨터’라 불린 20여명의 흑인 여성 수학자 그룹이 있었다. 이들은 미·소간 우주 경쟁이 치열했던 60년대 NASA에서 비행 궤도나 착륙 지점을 손수 계산하는 ‘인간 컴퓨터’로 활약했다. 2015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에게 자유 훈장을 받은 수학자 캐서린 존슨(98), ‘흑인 컴퓨터’의 리더이자 IBM 컴퓨터 프로그래머 도로시 본(1910~2008), 흑인 여성 최초의 우주공학 엔지니어 메리 잭슨(1921~2005)이 바로 그들이다.

3명의 주인공 중 유일한 생존자인 캐서린 존슨. 달착륙을 가능케 한 수학 공식을 발견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3명의 주인공 중 유일한 생존자인 캐서린 존슨. 달착륙을 가능케 한 수학공식을 발견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이들은 남성이나 백인 여성보다 적은 월급을 받으며 임시직으로 일했으나 성과는 눈부셨다. 캐서린 존슨이 발견한 수학 공식이 훗날 달 착륙을 가능케 했으니까. 멜피 감독은 “‘인물’ 혹은 ‘숫자’라는 중의적 뜻의 ‘피겨’(Figure)가 제목에 나오는 게 마음에 들었다. 당시 여성들은 위대한 ‘인물’이 아닌 인위적 ‘숫자’로 대접받았다. 이들은 사실 우주 경쟁의 판도를 바꾼 ‘숨겨진 인물들’(히든 피겨스)이었다”고 말했다.

자매애의 놀라운 힘

성차별, 인종차별 이중고 속에서 이 여성들이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캐서린 존슨을 연기한 타라지 P 헨슨은 “흑인 여성에게 팍팍한 시대라, 누군가 성공하지 못하도록 서로 끌어내려도 모자란데 이들은 경쟁하지 않고 상대방을 기꺼이 끌어올려줬다”고 했다. 예컨대 캐서린이 NASA의 핵심인 ‘스페이스 테스크 그룹’에 들어간 건 도로시의 추천 때문이었다. 이들은 동료의 능력을 믿고 지지했으며 차별에 가로 막힐 때마다 서로 위로하고 함께 극복하려 했다. 일하는 여성의 우정, 자매애, 팀워크, 연대를 긍정적 시선으로 그린 것은, 남성 서사가 주류인 한국 영화계에도 필요한 덕목이다.

여성이 발굴하고, 여성이 제작했다

영화가 완성되기까지도 여성의 손길과 연대가 있었다. 이야기의 첫 발굴자는 에세이 『히든 피겨스』(동아엠앤비)의 저자인 흑인 여성 작가 마고 리 셰털리다. 아버지가 NASA 직원이었던 그는 아버지를 통해 캐서린 존슨을 알았고, ‘이들의 이야기가 왜 알려지지 않았을까’ 의구심을 품었다. 그리고는 ‘흑인 컴퓨터’의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 폭넓은 조사를 시작했다. 셰털리 작가의 조사에 촉을 세운 이가 있었으니 바로 여성 영화 제작자 돈나 지글리오티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2008) ‘실버라이닝 플레이북’(2012) 등을 만든 베테랑 제작자는 에세이가 출간되기도 전에 영화화를 결정하고, 여성 작가 엘리슨 슈로더에게 각색을 맡겼다. NASA 프로그래머 출신 할머니를 둔 슈로더는 자신의 NASA 인턴 경력을 살려 지적 호기심과 휴머니즘을 두루 채울 수 있는 시나리오를 완성한다. 오스카 수상자인 옥타비아 스펜서가 도로시 본에 캐스팅되면서 영화 제작은 본 궤도에 올랐다. 특히 이 작품은 할리우드에서도 그 숫자가 3%에 못미치는 여성 카메라 감독(맨디 워커)이 찍어 화제가 됐다.

‘히든 피겨스’의 히든 피겨스

세계적인 팝스타인 퍼렐 윌리엄스는 이 영화의 진짜 히든 피겨스다. 제작자이자 음악감독을 맡았기 때문. 평소 여성의 삶에서 음악적 영감을 얻어온 그는 “흑인 여성들이 과학자, 수학자, 엔지니어로 나오는 영화가 없었고, 그게 슬픈 현실이었다”며 “그만큼 책임감을 느꼈고, 이제 여성이 합당한 대우와 인정을 받고, 동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 제작에 참여했다. 영화음악계의 거장 한스 짐머, 벤자민 월피시와 공동 작업한 음악도 발군이다. 이 작품이 흑인 수난사가 아닌 인권 쟁취의 승리사로 완성되는 데에는 흥겹고 경쾌한 음악이 한 몫했다.

김효은 기자 hyoe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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