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 안 단 8000억' 이건희식 해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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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가운데) 등 삼성그룹 수뇌부가 7일 서울 태평로 그룹본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기에 앞서 인사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인주 구조조정본부 사장, 배정충 삼성생명 사장, 이 구조조정본부장, 이윤우 삼성전자 부회장, 이상대 삼성물산 건설부문 사장. 김형수 기자

"정치자금과 자식들의 증여 문제로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리게 되어 매우 죄송스럽습니다."

7일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장(부회장)이 읽은 발표문을 통해 이건희 회장은 이렇게 심정을 밝혔다. 1987년 삼성 회장에 취임한 이후 개인의 이름을 걸고 국민 앞에 공식적인 문건 형태로 사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삼성 관계자는 "이 회장은 왜 삼성이 경제 공헌도에 어울리지 않게 국민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하는지 깊이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발표된 삼성의 사과와 대책에는 이 같은 이건희 회장의 고뇌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 파격적 해법=삼성이 내놓은 대책은 우리 사회 일부의 반(反)삼성 여론을 반영하고 있다. 내놓은 대책은 파격적이다. 사회 헌납 의사를 밝힌 8000억원의 기금은 예상보다 크며, 아무런 조건도 붙지 않았다. '삼성'이나 '이건희' 같은 타이틀을 고집하지도 않았다.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은 "헌납기금을 운영할 주체 등에 대해 정부와 사전에 교감한 것은 없다. 국가와 사회가 의논해 누가 맡을지가 정해지면 우리는 완전히 손을 뗀다"고 말했다. 헌납하는 8000억원 중 이 회장 일가가 새로 내놓는 3500억원도 시민단체가 '부당 이득'이라고 추정하는 액수를 그대로 반영해 산정했다. 거액의 사재 출연 결정은 그 성격상 참모나 주위에서 건의할 사항은 아니다. 사재 출연을 포함한 여러 해법은 지난해 봄 '삼성 공화국'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시작된 구상이다. 삼성 관계자들에 따르면 당시 이 회장은 반(反) 삼성 여론에 깜짝 놀라며 "왜 이런 소리가 나오는지 잘 연구하고 대책을 세워보라"고 지시했다. 사재 출연 결정은 지난해 11월께 최종 결심하고 구체적 방안을 마련할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국내 상황에 대해 깊이 고민하며 내린 결단이었다. 거액의 기금이 출연된 재단을 삼성으로부터 독립시켜야 한다는 지적은 장하성 고려대 교수 등 시민단체 관계자들의 주장이기도 하다.

삼성은 이 회장 일가의 사재 출연과 함께 사회공헌도 강화하기로 했다. 사회공헌은 이 회장이 기회 있을 때마다 적극적으로 강조해온 경영철학이다. 올해 신년사에서는 "우리의 경영성과와 지식.기술까지 이웃 사회와 함께 나누는 '상생 경영'을 펼친다면 사회의 지지와 성원은 자연히 따를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 여론의 기대와 뜻을 존중=삼성은 공정거래법에 대한 헌법소원 등 소송을 취하하고, 삼성에 비판적 시각을 가진 인사들로 구성된 '삼성을 지켜보는 모임'을 구성해 쓴소리도 듣겠다고 밝혔다. 국내 대표기업으로서 법적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국민정서를 고려하고 국민의 기대와 뜻에 부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지난해 6월 이 회장이 삼성 사장단에게 "어떤 가능성이든 열어두고 삼성이 국민에게 존경받고 사랑받는 방안을 연구해보라"고 지시한 것과 맥이 닿아 있다. 당시 사장단은 "단 1%의 반대 세력이라도 포용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하기도 했다.

삼성 경영의 사령탑이라 할 수 있는 구조조정본부의 인력을 축소하고 법무실을 분리하겠다는 것도 이 같은 고민의 결과다. 이 회장은 4일 입국하면서 "그동안 상품 1등 하느라 국내에서 (삼성이) 비대해지고 느슨해진 것을 느끼지 못했다"고 말했다. 삼성 관계자는 "구조조정본부 축소 운영은 자칫 형식에 치우치기 쉬운 법의 논리에 얽매이기보다 국민 정서와 더 깊이 교감하고 여론을 생생하게 반영하겠다는 의지"라고 말했다.

◆ 남은 문제는=이학수 본부장은 "우리로서는 최선을 다해 고민했다"고 말했다. 삼성의 현실에서는 내놓을 것은 다 내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론의 향배가 어떻게 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삼성을 둘러싼 논쟁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진행 중인 에버랜드 전환사채 관련 소송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관심이다.

삼성전자 등 주력 계열사에 대한 경영권 약화 가능성도 문제다. 사실 공정거래법과 관련해 삼성이 위헌 소송을 낸 것은 '적대적 인수합병(M&A) 가능성' 때문이었다. 상황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지만, 삼성은 법논리 대신 여론을 택했다. 이 부회장은 "기본적으로 경영을 잘해 주주들로부터 신뢰를 얻고 좋은 성과를 내는 게 경영권 방어법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이현상.임장혁 기자 <leehs@joongang.co.kr>
사진=김형수 기자 <kimh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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