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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생각 존중이 민주주의” 상생 메시지 남긴 이정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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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13일 오전 열린 퇴임식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에 대해 “참으로 고통스럽고 어려운 결정이었다”고 말했다. [사진 박종근 기자]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13일 오전 열린 퇴임식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에 대해 “참으로 고통스럽고 어려운 결정이었다”고 말했다. [사진 박종근 기자]

“헌법재판관이라는 자리는 부족한 저에게 참으로 막중하고 무거웠습니다. 고요하고 평화롭기만 해 보이는 그 자리가, 실은 폭풍우 치는 바다의 한가운데였습니다.”

“폭풍우 한가운데서 어려운 결정” #헌재소장 권한대행 어제 퇴임 #“법의 길 고통스럽지만 이롭다” #퇴임사서 법가사상 한비자 인용

헌정 사상 첫 대통령 ‘파면’을 결정한 뒤 헌법재판소를 떠나는 이정미(55) 재판관(헌재소장 권한대행)의 13일 퇴임사는 무겁고 엄숙했다. 그는 헌법재판관 6년, 공직생활 30년을 마감하면서도 개인적 소회는 단 두 문장에만 담았다. 그러면서 지금 우리 사회가 직면한 갈등과 반목, 분열을 지적하며 사랑과 포용으로 서로를 껴안고 화합하고 상생하자는 메시지로 퇴임사의 대부분을 채웠다.

퇴임식은 이 전 재판관의 요청에 따라 검소하게 치러졌다. 약 20분간의 퇴임식 뒤 그는 구내식당에서 재판관·연구관 등과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시래기된장국·냉이나물 등이 차려져 있었다. 오후 2시30분쯤 헌재 청사를 나갈 땐 강일원 재판관 등 7명의 재판관이 일렬로 서서 악수로 배웅했다. 헌재 밖에선 “법치주의 수호의 여신이다” “재판은 원천 무효다”라는 엇갈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퇴임으로 헌재는 대법원장이 후임자로 지명한 이선애(50) 변호사가 임명될 때까지 7인 체제로 운영된다.

이 전 재판관은 퇴임사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에 대해 “참으로 고통스럽고 어려운 결정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중국 법가 사상가 한비자의 “법의 도리는 처음에는 고통이 따르지만 나중에는 오래도록 이롭다”는 문구를 인용해 법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전 재판관은 “우리가 사랑하는 민주주의, 그 요체는 자신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는 데 있다고 믿는다”고 덧붙였다.

이 전 재판관은 탄핵심판 후반부를 관장했다. 박한철(64) 전 헌재소장의 퇴임(1월 31일) 이튿날인 지난달 1일 10차 변론부터였다. 박 전 소장은 퇴임 전 참여한 마지막 변론에서 “이 권한대행까지 퇴임하면 재판부가 7인 체제가 되기 때문에 그 전에 선고가 나야 한다”고 발언했고, 박 전 대통령 측은 공정성 문제를 제기하며 무더기 증인 신청을 이어갔다. 16차 변론 땐 대통령 측 김평우 변호사 등의 법정모독성 막말을 들었다. 그가 뒷목을 손으로 잡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탄핵심판 선고일인 지난 10일에는 머리에 헤어롤 두 개를 매단 채 출근해 화제가 됐다.

이 전 권한대행은 1987년 대전지법에서 판사로 입문했다. 대전고법에서 부장판사를 지내던 2011년 3월 이용훈 전 대법원장의 지명으로 헌법재판관이 됐다. 전효숙 전 재판관에 이은 두 번째 여성 헌법재판관이었다. 그는 재임 6년간 헌정사에 남을 굵직한 사건에 참여했다.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2014년 12월)에선 주심 재판관을 맡아 직접 결정문을 작성했다. “정당 해산 결정으로 민주적 기본질서를 수호하는 것이 정당 활동 자유의 근본적 제약이나 민주주의의 일부 제한이라는 불이익에 비해 월등히 크다”며 통진당 해산을 주문했다. ‘헌법 수호의 이익’이란 측면에서 박 대통령을 파면한 이유와 비슷했다. 이 전 권한대행은 재판부가 위헌 결정을 내린 간통죄에 대해선 “간통은 가족공동체 보호에 파괴적 영향을 미친다”는 여성의 입장에 서서 소수 의견을 내기도 했다. 김영란법, 사시 폐지, 성매매처벌법에 대해서는 합헌 의견을 냈다.

이정미 전 재판관은 현재로선 변호사 개업이나 출강 등의 계획은 없으며 당분간 휴식을 취하겠다는 뜻을 주변에 밝혔다.

글=서준석 기자 seo.junsuk@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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