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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그 순간'이 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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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이영희중앙SUNDAY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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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에서 요즘 푹 빠져 있다고 했던 애니메이션 ‘하이큐(사진)’ 이야기의 계속이다. 죄송하다. 맘에 드는 콘텐트를 만나면 줄기차게 그것만 편식하는 ‘덕후’ 기질의 소유자임을 이해해 주시길. 개인적으로 ‘슬램덩크’ 이후 최고의 스포츠 만화라고 생각하는 이 배구 만화에서 가장 마음이 가는 캐릭터를 고르라면, 가라스노 고등학교의 미들 블로커 쓰키시마다.

그는 큰 키와 빠른 판단 등 배구 선수에게 필요한 자질을 갖췄지만 늘 의욕이 없다. 팀원들이 “지역대회 우승!”을 외치며 늦게까지 연습을 할 때도 혼자 ‘칼하교’를 한다. 말버릇은 이거다. “(배구는) 기껏해야 부 활동일 뿐이잖아.” 노력해도 타고난 재능을 이기기 어렵고, 지역대회에서 우승한다고 해도 전국 어딘가엔 더 잘하는 팀이 있다. 넘고 넘어도 새로운 벽은 계속 생기는데 왜 다들 그렇게 기를 쓰는지 이해가 안 간다. “의미 없다, 의미 없어”의 굴레에 빠진 시니컬한 고등학생.

애니메이션 '하이큐'

애니메이션 '하이큐'

합숙훈련 도중 그는 타 학교 선배들에게 묻는다. “선배님들 학교는 우리보다 잘하지만 전국대회 우승은 어렵죠? 그런데 왜 그렇게 필사적이죠?” 한 선배가 답한다. 자신도 그 답을 최근에야 알았다고. 특기였던 크로스 스파이크가 블로킹에 계속 막혀 다른 기술을 죽도록 연습했고 다음 대회에서 블로킹 상대가 손도 못 댈 만큼 강력한 스파이크를 날렸을 때. “그 한 방으로 ‘내 시대가 왔다’는 기분이 들었지. ‘그 순간’이 있느냐 없느냐다. 만약 그 순간이 오면, 그게 바로 네가 배구에 빠지는 순간이다!”

강호 시라토리자와 고교와의 경기. 청소년 전국 대표인 스파이커 우시지마와 맞선 쓰키시마는 “내가 그의 공을 막을 리가 없잖아”로 시작한다. 하지만 경기가 진행될수록 무언가 끓어오르고 2세트의 마지막, 우시지마의 강스파이크를 처음 막아 내는 쓰키시마. ‘그 순간’이 찾아왔음을 느끼며 그가 주먹을 불끈 쥐어 올릴 때, 나는 울었다.

뜬금없지만 지난 금요일 오전 11시21분, 나도 ‘그 순간’을 만난 것 같다.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의 선언을 들었을 때다.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몇 번 나갔으나 ‘그래 봐야 대통령 한 명 바뀐다고 뭐가 크게 달라질까’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내가 이 민주주의 국가의 주권자이며, 그러므로 나의 목소리와 행동이 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단 걸 실감했달까. 나만의 느낌은 아닐 거라 확신한다. 그리고 ‘그 순간’을 만난 이들이 열어 가는 이곳의 배구, 아니 미래는 이전과 분명 다를 것이란 사실도. 

이영희 중앙SUNDAY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