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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예술이 우리를 구원하는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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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1호 22면

일러스트 김옥

일러스트 김옥

최근에 읽은 책 『리추얼』(의식적으로 반복되는 습관이나 의식)에서 내 마음을 끈 대목은 안무가 트와일라 타프가 보여준 의식이었다. 그녀는 무용수이자 로열발레단과 아메리카 발레 시어터의 안무가다. 영화 ‘백야’와 ‘아마데우스’의 안무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백영옥의 심야극장 #<42> ‘블랙스완’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연습복을 입고 레그 워머를 신고 후드티를 걸치고 모자를 쓴다. 그러고는 집 밖으로 나와 택시를 불러 세우고 운전사에게 91번가와 퍼스트 애비뉴 모퉁이에 있는 펌핑 아이언 체육관으로 가자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두 시간 동안 운동을 한다. 내 의식은 매일 아침 체육관에서 하는 스트레칭과 웨이트트레이닝이 아니다. 내 의식은 바로 택시이다. 운전사에게 목적지를 말하는 순간, 내 의식은 끝난다.”

내 의식은 바로 택시다! 이 문장이 나를 감전시켰다. 두 팔을 내린 채 턴아웃한 상태로 자신의 왼쪽 다리를 귀밑까지 들어 올릴 수 있는 80살 노인의 삶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발레를 한 번이라도 배워본 사람이라면, 그 동작이 저 나이에 가능하다는 게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알 것이다. 그녀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저 포즈를 연습했을 것이란 것도. 규칙적이고 단순한 삶이 예술가의 창작력을 높인다는 건 그녀의 책 『천재들의 창조적 습관』에도 잘 기록돼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분열』을 원작으로 한 대런 아로놉스키 감독의 영화 ‘블랙스완’은 내가 아는 한 발레에 관한 가장 치명적인 영화다. 우선 이 영화의 주인공 ‘니나’ 역의 나탈리 포트만은 발레 연기를 지도하던 뉴욕시티발레단의 수석 무용수 벤저민 마일피드와 실제 사랑에 빠졌고 그와 결혼했다. 나탈리 포트만은 이 영화로 2011년도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았는데, 그것은 대역 없이 많은 장면을 직접 연기했던 그녀의 투혼 때문이다. 백조의 호수 주인공으로 발탁되면서 생기는 내면적 갈등을 심리 스릴러로 다룬 이 영화에서 니나는 자신의 몸이 점점 흑조로 변형되어 가는 기괴한 꿈에 시달린다.

부자연스런 방식으로 만드는 극대화된 아름다움

발레는 단시간 안에 ‘연기’가 가능한 무용이 아니다. 4년째 발레를 배우고 있는 내 경우, 타이즈를 신은 채 거울 속의 나를 혐오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는 데만 1년 넘게 걸렸다. 스트레칭을 자유롭게 하기까지 2년이 걸렸고, 토슈즈를 신기까지 3년 가까이 걸렸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스페인어나 이탈리아어 같은 이국의 언어에 매혹돼 배우기 시작하면 점차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발레 역시 마찬가지다. 직립 보행이 자연스러운 사피엔스들에게 ‘턴아웃’이라는 전혀 다른 경험을 선사하니까 말이다.

중력을 무시한 ‘높이’는 어떤가. 발끝으로 9회전을 연속 도는 것이나, 두 다리를 곧게 편 채 날듯이 뛰는 일은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직관하게 한다. 여기에서 발레의 중요한 특징이 드러난다. 지극히 비인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킨다는 점 말이다.

중요한 건 어떤 것에 매혹되면 일어나는 ‘감각의 변화’다. 그것을 우리는 ‘욕망’이란 말로 바꿔 부를 수 있는데, 매혹의 속성이 그렇듯 그것에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치명적이기 때문에 ‘즐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발레에 대한 꽤 많은 글을 썼는데, 가능하기만 하다면 내가 쓴 모든 글에 똑같은 제목을 붙이고 싶은 심정이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그것이 바로 발레를 하는 모든 사람들이 느끼는 원초적 좌절감이다.

“니나. 네 춤은 꼭 불감증에 걸린 것 같아!”

기술적인 완벽함을 추구하던 예술가의 영혼이 이 말 한 마디에 무너진다. 발레단의 단장 토마스는 니나의 춤이 청순한 ‘백조’를 연기하기엔 완벽하지만 파괴적인 ‘흑조’를 연기하기엔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지독하게 경쟁적인 발레단 안에서 새로운 여왕의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일은 니나의 분열적인 성격을 조금씩 자극한다. 그녀가 흑조를 더 잘 표현하려고 노력할수록 그녀는 환상 속에서 자신 안의 어둠을 목도하고 복제한다.

발레단이 있는 링컨 센터에서, 뉴욕의 지하철 안에서, 화장실에서, 자신의 침대에서까지 말이다. 결국 니나는 기술적으로 완벽하지는 않지만 성적 에너지가 넘치는 자유분방한 발레 단원 ‘릴리’를 질투하며 파국으로 흐른다.

발레, 자기착취적이면서 나르시시즘 자극

이때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거울은 발레가 자신의 동작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예술이라는 것과도 관련된다. 바 앞에 놓인 거울을 바라보며 발끝과 척추는 곧은지, 발목과 허벅지는 최대한 턴아웃했는지, 발등의 ‘고’는 최대한 나왔는지를 계속 추적하는 것이다. 자신을 감시하며 확인하는 운동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이것만큼 자기 착취적이며 나르시시즘을 자극하는 무용도 없을 것이다.

“발레가 섹스보다 100배는 더 좋아.” 친구가 농담처럼 이 말을 꺼냈을 때, 나는 결국 웃지 못했다. 내가 발레를 시작하게 된 건 오랜 소망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게는 마음의 고통보다 더 큰 육체적 고통이 필요했다. 항암치료처럼 내가 병증과 싸우고 있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필요했고, 그것이 바로 명료한 ‘통증’이었다. 그때, 내 마음은 전쟁을 치른 후 완벽한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발레가 주는 고통은 차라리 살아있는 증거였으며 다행이었다.

실제 8개월 동안 나는 극심한 근육통에 시달렸는데, 한 번도 그것에 대해 불편부당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다만 이제야 친구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발레를 배우면 아름다움과 고통에 대한 새로운 문법과 언어를 갖게 된다. 나는 그것을 ‘고통이 아름다움으로 피어나는 순서’를 알게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이라고 발음할 때, 온 몸으로 감각되는 ‘아.름.다.움’의 육체를 온 몸으로 껴안는 것 말이다. 미치도록 보고 싶었던 사랑하는 남자의 품에 뛰어들듯 그렇게 와락 아름다움을 껴안는 것이다.

완벽함은 지속가능하지 않기에 아름답다

이쯤에서 질문해볼 법하다. 어째서 니나는 스스로를 죽여가면서까지 이 고통스러운 예술에 빠져들게 됐을까. 나는 그것이 정답이 있다고 믿는 세계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정답이 필연적으로 공유하는 단어는 ‘완벽함’인데, 사실 그것은 행복함 만큼이나 지속가능하지 않다. 예술적으로 커다란 성취를 한 사람들이 한순간 몰락하는 일은 완벽함과 지속성이 대부분 배치되기 때문이다. 매번 최고의 그림을 그릴 수 없듯, 매번 최고의 춤을 출 수도 없다. 매번 그것이 가능하게 하려면 그것은 언제나 마지막 공연이 되어야 한다. 죽어서 전설로 남는 것 이상의 지속가능한 완벽함은 없기 때문이다. 분열증을 겪으며 니나는 결국 자신의 어깨 위에서 검은 날개가 돋아나는 환상을 본다. 니나가 펼치는 흑조 연기가 완벽해지는 순간, 그녀는 스스로 흑조가 된다. “나는 완벽해질 거야”라는 주문이 아닌 “나는 완벽했어!”라는 유언 같은 말과 함께 말이다.

마지막 순간, 주인공의 과거가 눈에 담길 듯 읽히는 영화는 드물다. 하지만 내겐 그랬다. 처음 눈부시게 하얀 발레복이 예뻐 발레를 하겠다고 엄마를 조르던 꼬마 니나와 발레단에 입단하고 첫 주연을 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그려졌다. 혹독한 다이어트 때문에 몇 달씩 생리가 끊기고, 연달아 발톱이 빠지고, 인대가 늘어나는 과정이 내 눈에는 잡힐 듯 보였다. 그녀가 수없이 연습했을 동작들과 그녀가 반복해서 먹었을 음식들과 그 모든 것들이 말이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트와일라 타프의 삶과 꽤 비슷해 보였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이 남았다. 어째서 어떤 사람은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실패하는 걸까. 문득 매일 6병의 포도주를 마셨던 프랜시스 베이컨이나 한 보루의 담배를 피웠던 사르트르, 만 명의 여자와 잤다는 조르주 심농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떤 것들이 예술가의 삶을 성공과 실패로 규정하는 걸까. 발레 스튜디오의 커다란 거울 앞에 서니 많은 상념들이 떠올랐다. 예술로 성공하고 인간으로 실패하면 결국 남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삶보다 강한 예술이 결국 우리를 구원하게 되는 걸까. ●

백영옥 : 광고쟁이, 서점직원, 기자를 거쳐 지금은 작가. 소설『 스타일』『다이어트의 여왕』『아주 보통의 연애』 , 인터뷰집『 다른 남자』, 산문집『 마놀로 블라닉 신고 산책하기』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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