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실명제 10년] '검은 돈' 덜미…종합과세는 未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1면

"드디어 우리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합니다.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뤄집니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되지 않고는 이 땅의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없습니다. 정치와 경제의 검은 유착을 근원적으로 단절할 수가 없습니다."

1993년 8월 12일 오후 7시45분. 김영삼(YS) 당시 대통령은 금융실명제 실시를 전격 발표했다. 오후 7시에 소집된 임시 국무회의에서 금융실명제 실시를 위한 대통령 긴급 경제명령을 통과시킨 직후였다. 긴급 경제명령은 72년 '8.3 사채동결조치'이후 처음으로 발동됐다.

82년 5공화국 시절 장영자씨 어음 사기사건으로 금융실명제 실시 주장이 제기된 이후 11년 만이었다.

금융실명제는 금융관행을 일거에 뒤바꿔놓았다. 예금통장을 만들려면 반드시 주민등록증을 내보이고 실명확인을 받아야 하는 시대가 됐다. 가명(假名)계좌를 만드는 관행은 불법행위로 간주돼 철퇴를 맞았다.

금융실명제는 경제뿐 아니라 정치.사회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실명제 때문에 뇌물과 범죄자금 등 검은 돈을 감추기가 힘겨워졌고, 묻힐 뻔 했던 대형 비리사건이 실명제때문에 드러나는 일이 빈번해졌다. 그만큼 실명제 망을 피하기 위한 돈 세탁 수법도 더욱 교묘해졌다.

YS의 발표문에서 엿볼 수 있듯, YS는 실명제의 파장에 대한 총체적 고찰 없이 부정부패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실명제를 전격 도입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때문에 아직도 비밀보장 강화, 차명거래 근절, 종합과세 확대 등 보완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어 실명제는 '미완의 개혁'이며 '진행형'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고계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정책실장은 "현재의 금융실명제는 차명 예금을 할 수 있는 허점이 있는 데다 공평과세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며 "광범위한 차명 예금 범위를 축소하고 금융종합과세 대상을 확대하는 한편 자금세탁법을 강화해야 실명제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검은 돈 추적에 큰 기여=금융실명제는 검은 돈 추적에 큰 공을 세웠다. 특히 금융실명제 실시를 미뤘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5년에 금융실명제 그물에 걸려 구속됐다. 盧전대통령은 야당의원의 비자금 계좌 폭로 이후 일주일 만에 비자금 5천억원 조성 사실을 실토했다. 계좌에 기록이 남아있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던 셈이다. 실명제를 도입했던 YS 역시 실명제로 인해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 검찰이 YS의 차남 현철씨를 구속할 수 있었던 것도 실명제와 계좌추적 때문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 대북 송금 사건 역시 계좌추적이 실시되면서 전모가 드러났다.

특수수사통이었던 노관규 변호사는 "실명제 도입으로 검은 돈이 어떻게 움직이는가가 드러남으로써 계좌추적 등 수사에 획기적 전기가 마련됐다"고 말했다.

?종합과세는 아직 정착 중=금융소득 종합과세는 곡절 끝에 2001년부터 실시됐다. 부부 합산 금융소득이 4천만원을 넘으면 다른 소득과 통합해 종합과세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 8월 헌법재판소의 부부 합산 금융소득 종합과세 위헌 결정으로 올해부터는 1인당 4천만원을 기준으로 종합과세가 이뤄지게 됐다. 이를 두고 종합과세 기준금액을 낮춰야 한다는 지적이 강력히 제기되고 있어 제도 수술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안종범 성균관대 교수는 "실명제는 종합과세와 연계돼 있어야 하는데, 종합과세 대상이 국한돼 있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계좌추적 엄격히 관리해야=가명계좌가 만연했던 시절엔 계좌를 추적해봐야 검은 돈의 꼬리가 끊기기 일쑤였다. 그러나 실명제가 실시되면서 수사기관의 계좌추적은 힘을 얻기 시작했다. 자연히 수사기관의 계좌추적 의존도가 커졌다. 지난해 계좌추적 발동건수는 25만건으로 97년 7만6천건에 비해 3.3배나 늘어났다. 이 중 78%인 19만6천건은 법원의 영장심사 없이 발동된 행정편의적 성격이 짙었다. 금융실명제가 처음 실시된 93년만 해도 검찰과 과세 당국만 계좌추적권을 가졌으나, 외환위기 후 금융감독위원회.중앙선거관리위원회.공직자윤리위.공정거래위원회 등으로 확대된 결과다.

대한상의는 "행정기관이 직접 계좌추적권을 발동하는 것은 당사자의 헌법상 기본권을 부당하게 침해할 우려가 크다"며 제도정비를 촉구했다.

이상렬.김창규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