權씨 "내 주머니는 정거장일 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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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에 엄청난 파란이 일 것 같다. 민주당 권노갑 전 고문이 현대그룹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알려진 비자금 수백억원의 사용처에 대한 수사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검찰 측의 설명에 따르자면 이 돈은 선거자금으로 쓰여졌을 가능성이 크다. 만일 선거에 지원됐고, 그 내역이 밝혀지면 그 파장은 예상하기조차 어렵다.

그동안 민주당은 1백50억원+α가 옛 여권에 유입됐다는 의혹을 강력히 부인해왔다. 당시 민주당 사무총장으로 16대 총선을 실무적으로 지휘한 동교동계 김옥두(金玉斗)의원은 지금까지 "지난 총선을 역대 여당 중 가장 깨끗하게 치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權씨가 현대 비자금을 받았다는 혐의가 나옴에 따라 金의원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됐다.

당시 선거는 대통령이면서 민주당 총재인 DJ(金大中 전 대통령)가 직접 관여한 상태에서 치러졌다. 權씨는 사실상 DJ의 대리인으로 공천 작업에 간여했고, 출마자들을 적극 지원했다.

청와대에선 "權씨 혐의는 고(故)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에 대한 검찰 조사에서 나온 것으로 정치적 의도는 없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검찰에 대한 청와대 등의 정치적 통제력은 과거처럼 강하지 않다. 따라서 이번 사건을 정치적 의도라는 측면에서만 분석하기엔 문제가 있다.

하지만 그 정치적 파장은 다르다. 청와대의 검찰 장악력이 약화됐기 때문에 오히려 權씨에 대한 수사가 DJ를 압박할 수도 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노무현(盧武鉉)대통령과 DJ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달라질지 모른다.

權씨 체포는 당장 민주당 내부의 신당 논의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權씨와 정치적 맥이 닿아 있는 민주당 구주류가 타격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구주류는 盧대통령의 지지율 하락과 함께 신주류의 '개혁신당' 추진작업이 표류하고, 현 정권에 대한 호남 민심이 악화하면서 기세를 올리던 참이었다. 8월 중 전당대회를 열어 신주류의 신당 추진을 무산시키겠다는 생각까지 갖고 있었다. 하지만 權씨 체포는 구주류의 위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신주류는 "그래서 정치개혁을 해야 하고, 신당을 해야 한다"며 구주류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정치권에선 盧대통령이 민주당에 냉담한 태도를 보일 때부터 '대대적인 정치권 사정설'이 나돌았고, 그것은 신당 등 정계 재편을 위한 것일 거라는 관측도 있었다. 權씨 체포는 우연이든 아니든 그런 관측이 맞아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구주류의 생존을 위한 반격 등으로 신주류가 역공을 당할 가능성도 있다. 정국은 앞으로 權씨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 것인지와 검찰이 밝혀내는 내용이 어떤 것일지에 따라 요동치게 됐다.

◇수도권.신인 집중 지원=정치권에선 4.13총선 당시 민주당이 1천억원대의 총선 자금을 썼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당시 權씨가 공천을 막후에서 주도하면서 비공식 자금의 조달과 배분도 지휘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총선자금은 특히 수도권 등 전략지에 출마한 후보들이나 386후보들에게 집중 지원됐다는 게 당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386출신의 초선 의원은 "현역보다 새로 선거치르는 사람이나 경합 지역에 더 많이 배분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서울에 출마했던 한 인사도 "비공식적으로 받은 돈을 합치면 10억원 이상이 되는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이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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