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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조작된 도시' 오정세, 지질한 악역 NO! 섬세한 반전 악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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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청스럽다. 평범한 듯 엉뚱하다. 가끔은 무섭고 서늘하기까지 하다. 오정세는 늘 뒷일을 궁금하게 만드는 기묘한 배우다. ‘조작된 도시’(2월 9일 개봉, 박광현 감독)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가 연기하는 국선 변호사 민천상도 알다가도 모를 인물이다. 왜소하고 지질한 척하지만, 실은 무서운 장악력으로 판을 뒤흔든다. 누가 오정세 아니랄까 봐.

'조작된 도시' 오정세 인터뷰

‘조작된 도시’의 국선 변호사 민천상(오정세)은 겉과 속이 다른, 빤한 악역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대체 배우가 딱히 생각나지 않더라. 그게 ‘배우의 힘’이라 느꼈다.
“‘민천상’이란 인물이 나를 통해 하나하나 만들어져서 그럴 거다. 머리 스타일부터 옷차림, 걸음걸이까지 민천상을 입체화하는 건 오로지 나의 몫이었다. 아마 다른 배우가 연기했다면 전혀 다른 모습의 민천상이 됐겠지.”
민천상은 최근 한국영화에서 만난 가장 지질해 보이는 악역이다.
“인간적으로 연민이 생기는 국선 변호사로 보여야 극 후반부의 악한 모습이 더 강렬하게 전해질 것이라 생각해, 외모를 더욱 볼품없게 만들었다. 왜소한 사람처럼 보이려 체중을 10㎏ 줄였고, 등이 굽어 보이도록 작은 보형물도 댔다. 남에게 빌려 입은 듯 품이 큰 정장 차림에, 촌스러운 2 대 8 가르마를 한 것도 그런 이유다. 앞머리도 위로 더 밀어서 이마가 좀 더 드러나도록 했다.
안약을 수시로 넣고, 한쪽 눈 주변에 커다란 오타반점을 그리는 아이디어도 냈다던데.
“일본 배우 기타노 다케시를 자세히 보면 안면장애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한쪽 눈을 계속 깜박인다. 그 묘한 느낌을 민천상에게도 주고 싶었는데, 아무리 연습해도 흉내 내는 것 이상으로 표현되지 않더라. 그래서 눈이 안 좋은 사람인 양 틈틈이 안약 넣는 설정을 취했다. 극 중에선 짙은 색의 오타반점으로 표현됐지만, 내 아이디어는 사실 보일 듯 말 듯 흐릿한 반점이었다. 그래야 더 딱한 인상을 줄 수 있을 거라고 봤는데, 이 부분은 박광현 감독님과 내 생각이 달랐다.”
오타반점의 색이 중요한가.
“첫 등장부터 섬뜩한 인상을 주면 후반부 반전의 힘이 약해질 수도 있으니, 너무 짙은 분장은 피하고 싶었다. 그런데 박 감독님이 ‘민천상이 처음 등장할 때, 관객이 그가 범인인 걸 눈치채도 아무 상관없어요’라고 하시기에, 그 의견을 따랐다. 민천상의 실체가 아니라, 실체가 드러난 뒤 세상에 조작을 가하는 모습이 더 중요하다고 보신 거다.”
처음 그린 민천상의 모습이 기억나는지.
“처음 시나리오를 읽고 내가 메모한 게 ‘유아적’ ‘외로움’ ‘처음 보는’ ‘일상적이지 않은’ ‘예상을 벗어나는’ 등의 말들이었다.”
극 후반부 권유(지창욱)와 전화 통화하며 감정을 폭발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이토록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면 분노가 표출될 때도 남다르게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들처럼 괴성을 지르며 날카롭게 감정이 퍼져 나가는 게 아니라, 몸 둘 바를 모르는 듯한 느낌. 민천상이 권유를 잡았다고 좋아할 때도 자세히 보면, 난 소리 지르지 않는다. 아무 말 없이 아이처럼 기뻐서 발만 동동 구른다. 이 연기는 사실 잉글랜드 축구팀 ‘맨유(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슨 전 감독에게서 따온 것이다. 자기 팀 선수가 골 넣으면, 퍼거슨 감독은 마치 아이처럼 신나하지 않나. 난 그게 참 묘하게 보이더라.”
흥미로운 캐릭터를 적어 놓는 수첩이라도 있나.
“잊어버릴까 봐 메모해 둘 때도 간혹 있지만, 보통은 머릿속으로만 기억해 두는 편이다. 내 정서로 느껴지지 않으면 100번 적어 둔다 해도 써먹지 않는다.”
다른 영화의 캐릭터를 모티브로 연기한 적도 있나.
“처음으로 악역이 멋있다고 생각했던 영화가 ‘프라이멀 피어’(1996, 그레고리 호블릿 감독)였다. 에드워드 노튼에게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아이처럼 순수해 보이던 사람이 이렇게 무섭게 변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따라한 건 아니고, 그런 정서를 가져온 캐릭터가 ‘시크릿’(2009, 윤재구 감독)의 경호(오정세)였다. 어수룩한 마약쟁이처럼 굴다가, 영화 끝자락에는 전혀 다른 면모를 드러내는 역할이었지.”
‘남자사용설명서’(2013, 이원석 감독) ‘히어로’(2013, 김봉한 감독) ‘하이힐’(2014, 장진 감독) 등 한동안 주연 배우로 올랐다가, 최근 다소 주춤한 상태다. 다시 주연급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부담은 없나.
“역할은 역할일 뿐이다. 큰 역할을 하면 좋겠지만, 작은 역할이어서 아쉽거나, 더 쉽거나 한 것도 아니다.”
연기할 때 중요하게 여기는 원칙이 있다면.
“최대한 자연스럽게 하려고 한다. 아무리 센 캐릭터여도, ‘이 신에선 내가 다 잡아먹을 거야’ 하는 식으로 돋보이려는 연기는 안 하려고 한다. 그건 전체 영화에도, 인물에게도 독만 될 뿐이다. 나는 오히려 내 인물이 좀 더 뒤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래도 흥행에 대한 갈증은 클 것 같다. 내가 그토록 공들인 캐릭터를 많은 사람이 봐 줬으면 하는.
“‘내가 이 역할을 따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하는 아쉬움은 짧을수록 좋다. 흥행에 집착해 봐야 득이 될 게 없거든.”
흥행 배우로 자리매김하면 좋은 영화나 배역에 대한 기회가 많아지지 않을까.
“송강호·이병헌·전도연 선배 같은 톱배우라 해서 원하는 영화와 캐릭터를 모두 가져갈 수 있을까? 아니다. 괜찮다 싶은 영화는 주연이건 조연이건, 배역마다 배우들이 줄 서서 기다린다. 이것은 모든 배우의 숙명이다. 사실 민천상 역도 내 앞에 두 명의 배우가 더 있었다. 어떤 배우든 좋은 영화를 만나려면 길게 봐야 하고, 많이 기다려야 하고, 운도 따라 줘야 한다. 그저 1년에 단 한 편이라도 좋은 영화를 만날 수 있으면 다행이라 생각한다.”
미씽나인(사진=MBC)

미씽나인(사진=MBC)

지난 1월 방송을 시작한 TV 드라마 ‘미씽나인’(MBC)을 한창 촬영 중이다. ‘조작된 도시’에 비하면 최대한 힘을 빼고 연기하는 것 같던데.
“작품에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유쾌하게 임하려하고 있다. 기본적인 장르는 미스터리 스릴러지만, 정기준(오정세)이 이 드라마에서 숨 쉴 수 있는 포인트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톱스타와 일하는 매니저로 나오는데, 마음은 더없이 편하다. 톱스타 연기는 ‘남자사용설명서’ 때 해 봤는데, 너무 힘들었다. 그때 내가 차에서 내리면 여성들이 ‘오빠~’ ‘멋있어요!’ 하며 환호성을 지르는 장면이 있었다. 그냥 걸어가는 연기인데도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다(웃음).”
다음 영화는.
“지난해 이미 로맨스영화 ‘그대 이름은 장미’(조석현 감독)와 액션영화 ‘머니백’(허준형 감독)의 촬영을 마쳤다. 올해 개봉하지 않을까 싶다.”
영화·TV드라마 가리지 않고 1년에 대여섯 편씩 찍는 것 같다. 워커홀릭인가.
“일하는 게 제일 좋긴 하다. 작품을 미치고 쉴 때도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잘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편이다. 쉬고 있으면 휴식이나 충전하는 게 아니라 게을러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촬영 없는 날도 가만히 있기보다 뭐라도 배우려고 할 때가 많다. 쉬거나 느리게 걷는 것은 도통 체질에 맞지 않거든.”

백종현 기자 jam1979@joongang.co.kr 사진=정경애(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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