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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초등생용 한자 300자 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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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양영유
양영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양영유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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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정 개편은 상상을 초월하는 권력투쟁이다.” 2007년 1월 16일 당시 김신일 교육부총리에게 들었던 말이다. 시대 변화에 맞춰 교육 과정을 바꿔야 하는데 관련 교사·교수·단체가 격하게 대립해 손을 못 대겠다는 고백이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데 권력투쟁은 변하지 않는다. 초등 5~6학년용 기본 한자(漢字) 300자를 둘러싼 전쟁이다. 교육부가 2019년부터 초등 교과서에 음과 뜻 표기가 가능한 표준 한자 300자를 정하려 하자 10년 전의 데자뷰가 벌어진다.

먼저 한자 표기를 찬성하는 학계·단체의 주장. “①기념식수는 기념으로 마시는 식수인가요. ②낙성대는 어디에 있는 대학인가요. ③구제역은 몇 호선이죠. ④시험을 망쳐 사기가 떨어졌는데 밥을 먹다 사기그릇을 떨어뜨렸어요.” 학생들이 이런 질문을 한다면? “①식수(植樹)와 식수(食水) ②집터 대(垈)와 큰 대(大) ③전염병 역(疫)과 역 역(驛) ④사기(士氣)와 사기(沙器)의 뜻 차이를 한자로 설명하는 게 효과적”이라는 게 한자 표기 옹호론자들의 입장이다. 어려운 한자를 가르치자는 게 아니라 흥미 유발의 길을 터 주자는 것이란다.

한글 학계·단체의 주장은 정반대다. 전후 맥락을 보면 이해할 수 있는 단어들인데 머리가 여물지 않은 아이들에게 한자 부담과 공포감만 심어줄 거라며 날을 세운다. 한자 표기가 더 헷갈릴 것이라고도 주장한다. ①건설(建設) ②단속(團束) ③대상(對象) ④사실(事實) 등이 그 예다. 초등생 수준에 맞게 훈(訓)대로 가르쳐야 하는데 “건설은 베풀 설의 뜻이 통하지 않고, 단속은 의역에 의역을 해야 하고, 대상은 코끼리와 연결이 안 되고, 사실은 열매의 뜻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양측의 기(氣)싸움은 계속된다. “한·중·일은 같은 한자 문명권인데 늦게 가르치면 한자 격차(디바이드)가 생긴다” “중학교 때 시작해도 충분하다”는 논지도 팽팽하다. 답답한 건 교육부다. ‘눈치 대왕’답게 초등생용 한자 300자를 정해 놓고도 두 달째 발표를 미룬다. 권력투쟁에 또 휘말린 까닭이다. 그러고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네 살배기 외손녀가 당시(唐詩)를 줄줄 외우는 동영상을 보고 한글 전용론자들이 양보를 했으면 좋겠다고 한다. 인공지능(AI)이 외국어를 척척 번역해주는 시대가 와도 밥상의 ‘수저’처럼 한글과 한자의 관계는 변하지 않는다. 적절한 교육 시기와 혼용의 묘미를 살릴 지혜를 모아야 한다. 초등 5~6학년 한자 교육, 세종대왕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양영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