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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지만 사무치는 목소리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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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호 27면

1960년 말보로 음악제 실황 음반. 최근 리이슈 LP다.

1960년 말보로 음악제 실황 음반. 최근 리이슈 LP다.

LP 한 장이 택배로 도착했다. 튼튼한 종이박스를 뜯으니 비닐 에어쿠션 속에 뽁뽁이로 감싼 음반이 들어 있다. 인터넷서점에 주문한 지 24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이다. 3만 원대 상품인데 배송료도 없이 이토록 신속 안전하게 보내 주니 경쟁이 좋긴 하다.

[an die Musik] #슈베르트 ‘바위 위의 목동’

음반은 1960년 미국 버몬트에서 열린 말보로 음악제 실황을 수록한 컬럼비아 LP인데, 최근 리이슈로 나왔다. 브람스의 ‘사랑의 노래-왈츠’ Op. 52와 슈베르트의 리트 ‘바위 위의 목동’ D. 965가 실려 있다. 피아니스트 루돌프 제르킨과 레온 플라이셔, 내가 잘 모르는 그 시절의 가수들과 연주자들 이름이 재킷에 적혀있다. 음반을 산 것은 미국 소프라노 베니타 발렌테가 부른 ‘바위 위의 목동’을 듣기 위해서다. 나는 몇 번의 클릭으로 이 음반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선배 매니어 한 분은 이걸 구하기 위해 오랜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1978년 늦봄, 건축가 김영섭은 밤새 설계도면과 씨름하다 퇴근해 쓰러지듯 잠자리에 누웠다. 그리곤 버릇처럼 카세트 라디오의 전원을 켰다. 아무리 피곤해도 뮤즈의 숨결 한 자락을 호흡해야 꿈나라로 갈 수 있었다. 따당, 체념처럼 울리는 피아노에 이어 클라리넷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익숙한 곡 슈베르트의 ‘바위 위의 목동’이다. 소프라노가 빌헬름 뮐러의 시를 노래한다. “높은 바위 위에 서서, 깊은 골짜기를 굽어보고 노래 부르면, …협곡에 부딪혀 메아리 되어 울려오네.”

그런데 처음 듣는 목소리다. 한없이 투명하고 청아하다. 김영섭은 재빨리 녹음 버튼을 누르고 끝까지 들은 다음 DJ가 불러주는 이름을 적었다. 베니타 발렌테. ‘목동’은 즐겨 듣는 곡이라 그때까지 모은 음반이 많았다. 엘리자베스 슈만, 엘리 아멜링, 리타 슈트라이히, 군둘라 야노비츠…. 김영섭은 그 날 밤 그녀들을 모두 떠나보냈다.

다음날부터 새 신데렐라 베니타 발렌테의 음반을 수소문했다. 하지만 18년 전에 나온 음반은 세상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미국, 파리, 프랑크푸르트의 대형 음반점에 문의해도 마찬가지였다. 열병에 빠진 지 2년이나 지나 그는 처음으로 음반을 구경하게 된다. 지령을 받은 사무실 직원이 LA출장길에서 드디어 낡은 LP를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음반은 전체를 X자로 긁어 놓아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다시 3년이 흘렀다. 김영섭은 선배 애호가 고 안동림 교수의 자택을 방문했다가 베니타 발렌테의 ‘목동’과 조우한다. 이번엔 상태가 완벽했다. 그런데 그것은 안 교수가 서울 소공동 지하상가에서 집어 온 것이었다. 온 세상을 다 뒤진 김영섭으로서는 허망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김영섭은 그 음반을 빼앗다시피 들고 가 애지중지 아껴들었다. 나중엔 닳는 것이 아까워 녹음을 해서 들었다. 음반 한 장이 수중에 들어왔지만 갈증은 여전했다. 92년 일본 소니는 말보로 페스티벌 40주년 기념으로 그 음반을 CD로 발매했다. 도쿄 시내 음반점에 CD가 깔리는 날 김영섭의 부탁을 받은 일본의 고교 동창은 음반 가게를 순례하며 ‘목동’을 20여장이나 쓸어 담았다. 그것들은 김영섭으로부터 베니타 발렌테 열병이 전염된 동호인들에게 하나씩 돌아갔다. (김영섭 저 『오디오의 유산』)

김영섭으로 하여금 20세기의 디바들을 한꺼번에 내치게 만든 베니타 발렌테는 ‘목동’을 어떻게 부를까. 빙글빙글 돌아가는 LP에 바늘을 내린다. 목소리에 호소력이 있지만 좀 가늘다. 안동림 교수는 음반을 가슴에 품고 서둘러 돌아가는 김영섭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너무 살집이 없지 않나?”

나도 몇몇 디바의 목동을 가지고 있다. 바흐의 교회 칸타타에 능숙한 마리아 슈타더는 애상 짙은 슈베르트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대 스타에게 미안한 표현이지만, 메조 소프라노 크리스타 루트비히는 끝까지 들어주기 힘들 정도로 어색하다. 나에게 최고는 엘리 아멜링이다. 기교가 완벽하고 목소리도 아름답다. 살집이 좀 부족하지만, 발렌테도 좋다. 가늘고 여린 목소리가 사무치는 슈베르트를 잘 표현한다. 새벽 잠자리의 김영섭을 매혹시킨 것도 이런 분위기 아니었을까.

‘바위 위의 목동’은 슈베르트의 마지막 작품이다. 그럼에도 허술한 구석이 없다. 연주시간은 12분이나 된다. 그의 리트들은 짧으면 2분, 길어도 5분 남짓이다. 악기 구성도 특이하다. 피아노 반주 외에 클라리넷이 가세한다. 사람의 목소리를 닮은 악기 클라리넷은 소프라노와 이중창을 부르듯, 긴 여정에 동행한다.

가사는 슬프다. “나에게서 즐거움은 사라졌고, 이 세상에 희망이란 없다”고 부르는 베니타는 흐느끼듯 목소리를 떤다. 후반에서 템포가 알레그로로 바뀌며 잠시 희망을 노래한다. “봄이 오누나, 이제 나는 방랑을 떠나러 모든 준비를 마치노라.” 그러나 슈베르트는 새 봄을 맞이하지 못했다.

글 최정동 기자 choi.jeongd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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