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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잘 안 보이지만 눈밭에선 시속 60㎞ … 비결은 ‘고운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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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시각장애인 스키 국가대표 양재림(오른쪽)이 8일 장애인 겨울체전 알파인 스키 회전 경기에서 가이드 고운소리와 슬로프를 내려오고 있다. [사진 대한장애인체육회]

시각장애인 스키 국가대표 양재림(오른쪽)이 8일 장애인 겨울체전 알파인 스키 회전 경기에서 가이드 고운소리와 슬로프를 내려오고 있다. [사진 대한장애인체육회]

제14회 장애인 겨울체전 알파인 스키 여자부 회전경기가 열린 8일 평창 알펜시아 스키장. 가이드 고운소리(22·국민체육진흥공단)가 기문을 통과하면서 코스를 설명한다. “다운!” “턴!” “업!” 뒤따라 내려오는 시각장애인 국가대표 양재림(28·국민체육진흥공단)이 그 신호에 따라 자세를 낮추고(다운), 회전을 하고(턴), 활강을 위해 몸을 일으킨다(업). 그렇게 한 몸처럼 가파른 슬로프를 내려온 두 사람은 경쟁자들을 제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시각장애인 국가대표 양재림
2명이 1조 이뤄 뛰는 알파인 스키
고운소리 만난 뒤 기량 크게 늘어
내달 정선 월드컵서 ‘평창 리허설’

양재림은 체중 1.3㎏ 미숙아로 태어난 뒤 산소과다로 시력(시각장애 3급)을 잃었다. 10여 차례 수술로 오른쪽 눈은 조금이나마 볼 수 있지만, 왼쪽 눈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경기등급 ‘B2’. 일반인이 60m 거리에서 볼 수 있는 것을 2m 앞에서 알아볼 정도의 시력을 말한다. 그런 양재림이 시속 60㎞로 활주할 수 있는 건 고운소리 덕분이다. 고운소리는 형광색 상의를 입고 슬로프를 내려가면서 무선장비로 신호를 보낸다. 가이드와 선수의 거리가 기문 2개 이상 벌어지면 실격이기 때문에 두 사람의 호흡은 중요하다.

양재림은 5살 때 스키에 입문했다. 균형감각을 키우기 위해서다. 2009년 대학(이화여대 동양화과)에 들어간 뒤 한동안 놓았던 스키 폴을 다시 잡았다. “패럴림픽에 도전해보라”는 장애인스키협회 권유를 받아 선수로 변신했다. 부모는 흰눈에 반사된 자외선 탓에 시력이 더 나빠질까 우려했지만 그의 도전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출전한 2014년 소치 패럴림픽에서 양재림은 눈물을 삼켰다. 회전에선 넘어졌다. 대회전에선 메달 직전이 4위에 머물렀다. 아쉬움이 너무 컸다. 사실 패럴림픽을 준비하던 중 다쳐 3개월간 훈련을 쉬었다. 개막 일주일 전에야 비로소 운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양재림은 “너무 아까워서 메달을 목표로 평창에 재도전하게 됐다”고 말했다.

손가락 하트를 만든 양재림(왼쪽)과 고운소리. [사진 대한장애인체육회]

손가락 하트를 만든 양재림(왼쪽)과 고운소리. [사진 대한장애인체육회]

협회는 2015년 6월 양재림의 새 가이드를 찾았다. 그렇게 해서 양재림은 유니버시아드 대표와 국가대표상비군을 거친 고운소리를 만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스키를 시작한 고운소리는 당시 선수생활을 접으려던 참이었다. 고운소리는 “처음 만난 언니는 조용하고 섬세해보였다. 두 번째 만났을 때 ‘힘들거야’라고 말하는데 배려가 느껴졌다 ”고 소개했다. 좀 내성적인 양재림은 “소리(양재림이 고운소리를 부르는 이름)는 밝고 긍정적이다. 흥도 많아 경기 전 춤을 출 때도 있다. 나랑 정반대라서 좋다”고 말했다.

둘은 2015년 8월 함께 처음 출전한 남반구 대회에서 2관왕(회전·대회전)에 올랐다. 이어 같은해 12월 캐나다 월드컵에서 은메달 2개를 따냈다.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한 달 뒤인 지난해 1월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양재림이 오른쪽 무릎을 다쳤다. 고운소리는 “골인지점을 통과하느라 언니가 다친 걸 못 봤다. 많이 다쳐 눈물을 흘리는 언니를 보며 미안했다”고 말했다.

고운소리는 양재림이 입원한 병원을 자주 찾아와 이야기도 나누고 용기도 북돋았다. 동생의 응원에 힘입어 양재림도 힘든 재활훈련을 씩씩하게 이겨냈다. 양재림은 “스키를 다시 탈 수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동생 덕분에 잘 이겨낸 것 같다”고 말했다. 2015~16시즌을 부상으로 마친 두 사람은 이번(2016~17) 시즌 복귀했다. 그리고 지난달 슬로베니아 월드컵에서 은메달 1개(회전)와 동메달 1개(대회전)을 따냈다. 최근 두 사람은 함께 한 이동통신사 광고에도 출연했다.

다음달 정선스키장에선 월드컵 파이널이 열린다. 평창 패럴림픽의 테스트이벤트다. 2018년 패럴림픽에서 멋진 ‘눈꽃엔딩’을 준비하는 두 사람에게는 중요한 모의고사다. “대회가 다가올수록 설레면서 긴장된다”는 언니(양재림)한테, 동생(고운소리)은 “언니 실력이 갈수록 늘고 있어서 보는 재미가 있다”고 응원한다.

패럴림픽 준비를 위해 대학원 진학을 미룬 양재림은 “메달을 따고나서 학업을 계속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고운소리도 휴학 중이다. 그는 양재림과 같은 학교(이화여대)에서 스포츠과학을 전공하고 있다. 두 사람은 평소 함께 맛집을 찾아다닌다. 둘 다 여행을 좋아해 함께 제주도에도 다녀왔다. 이번 시즌이 끝나면 함께 자전거로 제주도 일주를 할 생각이다.

고운소리가 양재림한테 말한다. “언니, 우리 학교도 같은데 패럴림픽 끝나고 같이 살자.” 서로에게 최고의 파트너인 두 사람이다. 

평창=김효경 기자 kaypub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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