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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이야기 해줄까 #12. 기이 - 열정적으로 부른다 (4)

중앙일보

입력

“뭐하냐?”

눈을 떴다. 모호한 시간과 공간 속이다.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다. 낮인지 밤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며칠이나 지났는지 무얼 하고 있었는지.

“밥이나 먹어.”

기이가 손가락 하나로 살짝 밀었다. 모니터 속 커서는 제자리였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다 다리 힘이 빠져 바닥을 굴렀다. 움직일 때마다 관절이 따로 노는 듯 삐걱거렸다. 식탁으로 와 앉았지만 음식이 넘어가지 않는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긴 하품 같은 건 얼마든지 나왔다. 잠이 들지 않으려 식탁에 올라 앉아 도둑고양이 마냥 기이를 구경했다. 자판을 두드리던 기이가 뒤돌아보았다. 그 새까만 눈이 금세 내 앞으로 왔다. 가만히 보는 눈동자, 아무것도 실리지 않아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눈동자.

“이야기 해줄까?”

손가락으로 나를 끌어당겨 귓속을 연다. 기묘한 감각, 기이가 그려내는 날것의 감각들이 내 공간을 두드리고 열어젖히고 함부로 환한 빛을 켠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이야기 숨결이 서늘하게 배어들었다.
기이가 입술을 오므려 뱉어낸 이야기는 이랬다.

‘마흔 살에 접어든 어떤 여자. 그녀는 몇 년째 혼자였고 이유도 재미도 의미도 없다고 느끼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어느 날 창 쪽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반짝거려 그것을 집어 들었다. 무지갯빛으로 묘하게 반짝거리는 빛은 투구벌레같이 생긴 곤충 등껍질에서 왔다. 분명 곤충의 빛을 만졌을 뿐인데 아이를 갖게 되었다. 여자는 기이한 호기심에 사로잡혔다. 주변과 모든 연락을 끊고 몇 달을 집 안에 숨었다. 늘 눈이 부셔 불면의 밤을 보내다 사방에 신문지를 꼼꼼하게 붙였다. 어떠한 빛도 스며들지 않게 되자 비로소 편안해졌다. 그리고 아이를 낳았다.’

“너라면 다음에 어떻게 하겠냐?”

“아이를, 그러니까 아이는 일종의 빛나는 곤충의 알에서 왔고…….”

“그런 게 언제 적 얘기냐?”

더 이상 대답하지 못하자 기이는 입을 닫았다. 끝없이 내리는 창밖의 눈이 지긋지긋하기만 했다. 사랑처럼 쉽게 지는 겨울 해도 지겨웠다. 기이가 거기, 거기하며 검지 끝으로 서야 할 장소를 가리켜주었다. 처음 표식보다 한참 뒤로 밀려난 자리다. 돌아보니 벽과 거리가 불과 몇 뼘이었다.

‘아이는 평범했다. 보통 아기들처럼 연약한 몸과 무구한 눈동자로 누워있었다. 태어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날의 아침이었다. 투구벌레의 그것처럼 말랑말랑한 껍질이 등으로 솟아올랐다. 아이는 등껍질을 등에 매단 채 바닥을 기어 다녔다. 움직일 때마다 오묘한 빛이 반짝였다. 빛은 푸르고 붉고 초록이거나 노랗게 쏟아져 내렸다. 등껍질은 날이 갈수록 단단해졌다. 여자는 아이의 등껍질에 똑똑 노크를 해보기도 했다. 여자는 빛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신문지를 더 촘촘하게 붙였다. 사방이 신문지로 덮여 두꺼운 벽을 이루었다.’

“다음 이야기는 네가 해봐.”

나는 얘기를 들으려 구부정해졌던 등을 곧추세웠다. 얼마든지.

“아이는 어차피 곤충 알에서 왔으니 변이를 거치겠지. 인간과 곤충 경계점에서 고뇌하며 고립돼 살아가는 중간형 인간이 되는 거야. 온전하게 사람으로 살 수 없는 그 고립이 스스로 만든 것인가, 외부에서 온 것인가는….”

“그래서.”

기이가 말을 끊었다. 창밖은 깜깜했지만 눈이 내린다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아직도 그러고 있네.”

“뭘?”

“왜 의심하지 않아? 등뼈가 파이는 일 같은 걸 왜 돌이켜보지 않는 거지? 고립되지 말고 죽지도 말고 살아야지. 사는 일보다 중요한 게 뭔데.”

“응?”

“심플하게. 그냥 사는 거야. 숭고하지도 하찮지도 않은 하루하루를 그냥.”

주춤 한걸음 물러났다. 내가 뒤로 물러났어도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여자는 어느 날 아침 아이가 깡충깡충 뛰어다니며 찢어놓은 신문지 뭉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곰곰 생각했다. 여자와 아이는 다음날부터 조심스럽게 세상으로 나아간다. 슈퍼에 다녀오고 산책을 하고 운동장을 뛴다. 종종 신기해하는 사람들이 아이에게로 몰려들었다. 염려와는 달리 그들은 아이 머리를 쓰다듬거나 등껍질을 똑똑 노크하다 시간이 지나면 제 갈 길로 가버렸다. 투구벌레 아이는 자라나는 동안 등껍질 속을 배낭처럼 사용한다. 책이며 뭐며 넣지 못할 것이 없다. 아이는 어려움을 겪기는 하지만 살아간다. 계속 평범한 일상을 살며 조금씩 자라난다.’

이야기는 끝났다. 나는 한 발짝 더 물러나 등을 기댔다. 겨우 한 발짝뿐인데 서늘한 벽에 닿았다. 영영 이곳에 새겨진 문양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 안도의 숨이 나왔다.
눈을 떠보니 모니터 화면만이 어두운 공간에서 파르스름했다. 나는 깨어있는 시간보다 잠들어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기이는 잠시라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커서는 제자리에서 깜빡거리지 않고 문장들을 찍어낸다. 나는 벽에서 나체의 등뼈가 오르내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입을 벌려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매번 하아, 신음만 밀려 나왔다.

아무것도 가늠할 수 없는 나날들이 빠르게, 혹은 천천히 지나갔다.
며칠의 밤과 낮이었는지 모르겠다. 요즘 내가 할 수 있는 건 발가락을 조금씩 꼼지락거리는 일뿐이다. 알몸이었던 기이는 내 옷을 입고 내 칫솔로 양치를 했다. 면도 후 나와는 달리 뜨거운 물에 면도기를 헹군다.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아도 월세를 냈고 외출도 날마다 했다. 집에서는 내 발뒤꿈치를 닮은 발뒤꿈치로 고양이처럼 조용조용 걸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벽에 하나의 문양으로 새겨질 거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나는 반들반들하게 검으며 거봉만 한 씨앗이 되었다. 옷이 커지고, 점점 더 커진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씨앗으로 진행 중이었다. 살갗이 눌러 붙고 뼈가 뒤틀리는 동안 기이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기가 어떤 통로를 거쳐 내게 왔는지, 세상의 모든 씨앗들이 어떻게 분화하는지. 벽에 이마를 대거나 어루더듬었던 기이의 시간 조각들은 내 경우와 달리 기묘하고 아름다웠다.

“밤인가?”

방금 전까지 이야기를 속삭이던 기이는 기척이 아주 없다. 오래 기다려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눈앞의 끝없는 어둠에 대고 다시 물었다.

“밤인가?”

“눈 내리는 겨울밤이지.”

어딘가에서 기이가 대답했다.
수많은 날들이 지났는데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창밖의 하얀 풍경들이 그리워 눈물이 솟았다.

작고 반들반들해진 나를 내려다보는 기이의 눈과 마주치자 눈물은 멈췄다.

“네가 완성되려면 몇 날이나 남았는지 모르겠다.”

기이가 셔츠 단추를 풀었다. 겉모습은 남자였는데 옷을 벗으니 여자 몸이다.

“다시 이 세상으로 올 수 있다는 사실을 네가 잊어버리지 않으면 된다.”

완전한 나체로 바닥에 눕더니 다리를 넓게 벌렸다.
손수건에 놓았던 나를 집게와 엄지로 집어 올려 끙, 하며 자신의 질 속으로 밀어 넣었다. 맹세코, 이런 모습으로 여자의 질 속에 들어온 건 처음이다. 기이의 질은 따뜻하지만 축축했고 시큼한 냄새가 났다.
나는 머리를 있는 힘껏 밀며 위로 올라갔다. 알려주지 않아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였다. 입을 벌린 자궁이 보였다. 마치 둥글고 커다란 달 같다. 미끄덩한 달의 입속으로 쏙, 골인하자 몸이 떨려왔다. 깜깜할 거라 생각했던 기이의 자궁은 빛으로 가득했다. 달 속에 들어온다면 꼭 이렇겠다 싶을 만큼 환하고 눈부셨다. 기이했다.

많은 날들이 지나갔다.
열정의 날들이었다. 수많은 시간이 그렇게 지나갔다 믿는다. 초침과 분침이 수천 번 교차하고 멀어지다 서로를 그리워하며 맞닿는 동안이었다 말하고 싶다.
나는 기이 안에 웅크리고 누워 나를 키운다.
자궁 속 물은 파랗고 차갑고 숨이 차다. 발끝부터 차오르는 물의 결, 눈앞이 아득해지면 내가 사라지는 순간이 스민다. 사실 이렇게나 작아져 물속에 누워있으니 무얼 할 수 있을까 싶다. 하지만 내가 씨앗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기에 두렵지 않았다.
뼈가 굳고 살이 자라나는 동안에는 조금 외로울 수밖에 없어 나로서 살아가는 그의 이야기를 꺼낸다. 그러나 언젠가는 나만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작고 까만 벌레의 깜빡거림을, 날것들이 흘리는 진물과 어둠을, 그 시간을 생생하게 견디는 세상 모든 문양들의 이야기를. 늘 꿈꿔왔듯 문장의 수없는 부메랑의 곡선을 그릴 수도 있겠지.
나는 아주 작고 반들반들한 씨앗으로 달의 물속에 누워있다. 내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으려 중간중간 부른다. 영영 사라지지 않고 새로운 내가 되고 싶어 열정적으로 부른다. 기이, 기이 하고.

- ‘기이’ 끝.


작가 소개    
동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9년, 단편 『아칸소스테가』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등단.
창작소설집 『마리 오 정원』
테마소설집 『2012신예작가』
12월 테마소설집 출간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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