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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잠잠한 까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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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호 31면

북한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매우 조용했다. 미사일 실험도, 핵 실험도, 도발도 없었다. 백악관 ‘금발의 집단’ 때문일 것이다. 북한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의 빠르고 강렬한 초기 대처에 놀랐을 것이다. 북한 지도부는 미국이 기후변화 대응이나, 유엔 및 개별 국가와의 관계에 대해 오랫동안 고수해왔던 정책을 단 일주일 만에 뒤집을 능력이 있는 대통령과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트럼프 시대의 불확실성에 우려 #미사일·핵 실험도, 도발도 없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지만 #당분간 미·중·러 자극은 피할 듯

북한은 트럼프 대통령이 무엇을 할지 잘 모르지만, 그가 자신이 불리해지는 상황에 대해서는 신경질적으로 반응할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트럼프는 북한이 미국 대륙을 향한 핵탄두 미사일을 개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왔다. 따라서 북한의 미사일 실험 준비에 대한 그의 반응은 매우 날카로울 것이다. 어쩌면 북한이 연료를 공급하고 발사대에 장착한 모든 미사일들을 파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러한 불확실성과 불안감이 적어도 당분간은 북한이 도발을 피하기로 결정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을 당혹스럽게 한 것은 단지 직접적인 북·미 관계만이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 시대의 도래는 북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본이나 시리아 등 많은 국가들과 미국 사이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중에서도 북한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미·중, 미·러시아, 한·미 관계의 변화 전망에 대해 알아보자.

중국과 미국의 관계 악화는 단기적으로 북한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중국이 동맹 북한과의 관계 증진을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은 실제로는 미국과의 대립을 원치 않는다. 북한은 이번 가을 19차 당 대회를 앞두고 있는 중국이 미국과 협상을 중단할지 궁금해 할 것이다. 미국은 남중국해와 대만 문제와 관련해 중국에 약간의 양보를 하면서 그 대가로 북한과의 관계를 느슨하게 하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 북한으로서는 심각하게 우려할 수 있는 전망임에 틀림없다.

미·중이 무력충돌까지 가진 않더라도 불편한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 중국 경제가 어려워질 경우 북한은 심각한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석탄과 철광석 등 북한의 주요 수출 품목 최대 고객은 중국이다. 원자재 가격은 그동안 하락 추세를 보여왔다. 트럼프의 영향을 받아 중국 경기가 침체되면 원자재 수요가 줄어들고 가격의 추가 하락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는 북한을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다.

미국과 러시아의 화해는 북한의 외교적 공간을 크게 압박할 수 있다. 오랫동안 북한은 러시아와 중국이 북한을 두고 서로 경쟁하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다. 만약 러시아가 미국과 가까워진다면 북한은 더 이상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고, 오로지 중국에 기댈 수밖에 없게 될지도 모른다. 북한이 중국 지도부가 원하는 것 이상의 힘을 실어줄 수도 있다. 이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북한을 방어하는 데 중국이 홀로 나서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중국이 북한 지원에 소극적으로 나올 수 있다.

트럼프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전화로 한반도문제 협력을 논의했다. 북한의 고민이 더욱 깊어졌을 것이다. 러시아는 북한보다 유럽과 중앙아시아와의 관계를 더욱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이 러시아와 전략적 협상을 할 때 북한에 대한 지원 중단을 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북한은 박근혜 대통령을 싫어하지만 적어도 그의 정책은 일관성이 있고 예측이 가능했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는 한국에서 앞으로 누가 집권해서 어떤 정책을 펼지는 북한은 물론 어떤 나라도 쉽게 전망할 수 없다. 북한은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 특이하게도 그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한국의 주한미군 주둔 분담금을 늘리고, 병력 일부를 철수시키겠다는 암묵적인 위협이 내포되어있는 그의 발언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난달 29일에 있었던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과 트럼프 대통령의 전화통화는 북한에 충격을 줬을 수 있다. “철통 같은 약속”, “확장 억제” 그리고 “모든 군사 능력을 동원한” 등의 발언이 포함되어 있어서다. 더군다나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장관의 첫 번째 해외 방문지가 한국이었다. 그는 이달 3일 한·미 국방장관 회담에서 북핵 위협을 미국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효과적이고 압도적인 대응’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아마도 북한은 과거에 트럼프를 지지한 것에 대해서 후회했을 것이다.

북한은 트럼프 시대를 맞아 찾아온 이런 불확실성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이 새로운 환경에서 북한은 무엇을 하게 될까? 지금까지의 답변은 ‘트럼프나 중국을 그리고 러시아를 자극할 만한 일은 피할 것으로 보인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대량살상무기(WMD) 개발이 반발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방향이라고 판단할 때까지만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무한정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어떤 점에서 그들은 기술적인 이유 때문에, 또한 김정은이 신년 연설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 발사 준비의 최종 단계에 진입했다”고 발표했기 때문에 장거리 미사일을 시험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북한은 약해 보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새롭고 변덕스러운 국제적 환경과 미국의 훨씬 더 예민한 반응, 그리고 다른 나라들로부터 여태껏 경험했던 것 이상의 반응들을 시험해보는 하나의 선택지가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WMD 개발 프로그램을 지연시켜 장거리 핵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명망과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또 다른 선택지가 있다. 그중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에 직면할 것이다. 그러나 위기지점에 도달할 때까지는 조용함이 지속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여지가 있다. 북한은 지켜보고 기다리며 도발을 피할 것이다.

이제 북한은 펄쩍펄쩍 날뛰고 긴장의 순간에는 얼굴을 찡그리는 트럼프 대통령과 직면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은 그가 난폭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고 이번에 한발 물러선 것처럼 보인다.

나는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자가 아니며 그의 대다수 정책을 매우 혐오한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 북한이 그들이 과거에 트럼프류처럼 했던 짓 그대로 돌려받는 모습을 지켜보며 은근한 만족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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