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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시대의 영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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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김환영
김환영 기자 중앙일보 실장
김환영 논설위원

김환영
논설위원

우리나라는 자녀들의 대입과 입사를 위해 당사자뿐만 아니라 온 식구가 총력전을 치르는 나라다. 대입·취업 열기 덕분에 국가는 얼마든지 국민 교육을 국가 목표에 맞게 유도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는 참 다스리기 쉬운 나라다.

쓸 만한 AI 통·번역기 등장까지가
한국의 미래 결정하는 골든타임
경쟁력 죽이는 교육 포퓰리즘도
국민과 유권자의 경계대상 돼야

대입 시험에 영작문이 나오면 영작문을 잘하고, 한자가 나오면 한자를 잘한다. 안 나오면 못한다. 아마 IQ 테스트로 합격자를 선발한다면 다른 나라 대비 국민 IQ가 대폭 상승할 것이다. 영시(英詩)나 한시(漢詩)로 뽑는다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시인의 나라가 될 것이다.

이러한 열기의 무의식적인 뿌리는 신분제의 철폐다. 조선왕조의 붕괴,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치며 공부만 잘하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대학만 나오면 좋은 직장·직업을 가질 수 있게 됐다. 과도하게 보일 수도 있는 교육열은 유교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신분제와 결합돼 있던 유교가 붕괴한 덕분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모든 영역에서 후진국에서 중진국을 거쳐 선진국에 접근해가고 있다. 영어의 경우도 일본과 더불어 꼴찌 수준에서 이제는 ‘영어 중진국’ 정도는 된다. 같은 꼴찌권이었던 일본의 영어 실력이 상대적으로 정체하는 가운데 대한민국은 발돋움을 시작했다. 2016년 영어능력평가지수(EF EPI)에서 72개국 중 27위다.

영어 능력 키우기는 당연한 과제였다. 영어 강국·선진국이 되는 것은 세계화 시대의 언어 인프라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잘사는 나라들은 영어 잘하는 나라’라는 눈에 빤히 보이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최근 복병을 만났다. 첫째, 201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부터 영어 영역이 ‘절대평가’로 바뀐다. 영어 학습 부담을 줄이는 게 정부 목표지만, 영어가 일정 수준이 넘으면 수학 학원으로 몰려간다. 둘째, 소위 ‘스펙’에 포함되던 영어 점수보다 창의성·리더십 등이 중시되고 있다. 셋째, 인공지능(AI)의 발달로 언젠가 로봇 통·번역사가 등장하면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를 굳이 배울 필요가 없다는 기대가 커졌다. 지금도 스마트폰에 담긴 번역기 앱을 사용하면 외국 여행·출장을 다녀올 수 있다. 한 사원 교육 담당자에 따르면 회사가 사원들에게 ‘어마어마한’ 영어 수준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굶는 일 없이 식당 가서 영어로 주문해 식사 잘하고 업무 잘 보고 돌아오면 된다는 얘기다. 이제 우리말만 알면 외국인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해 질 수 있다.

언젠가는 영어 한마디 못해도 영어권으로 유학 갈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과학소설(SF)에 나오듯 뇌에 칩을 꽂는 것만으로 영어가 술술 나오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늘밖에 한계는 없다(The sky is the limit).” 상상력밖에 한계는 없다. 사람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상상한 것을 언젠가는 이뤄낸다.

반론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첫째, 그 ‘언젠가’가 언제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 강남 갔던 제비가 한두 마리 돌아왔다고 해서 봄이 온 것은 아니다. 인간 수준의 번역 소프트웨어가 나왔다는 말은 광고성 색채가 짙다. 아직은 대다수 전문가들이 AI가 통·번역사 대체를 대체할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음성 인식이라는 난제 때문에 말을 번역하는 수준에 도달하려면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미국의 경우 통·번역은 현재 고속 성장산업이다. 20~30년이라는 아주 가까운 미래에 쓸 만한 AI 번역기가 나올 수도 있다. 문제는 그 20~30년이 우리나라가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늠하는 골든타임이라는 점이다.

둘째, 외국어를 공부하면, 특히 이중 언어 사용자가 되면 머리가 좋아진다. 뇌가 바뀐다. AI 시대에도 필요한 것은 창의성 있는 좋은 머리다. 외국어를 공부하면 치매 발생 시기가 늦춰진다고 학계에 보고됐다. 셋째, 영어는 계급의 문제와 관련됐다. AI 통·번역기를 쓰는 사람과 쓰지 않는 사람에 계급적 차이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새로운 신분제의 등장이다.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 능력 제고는 국가경쟁력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군사·안보·교육은 초당적인 문제다. 이번 대선 시즌에도 대선주자들이 각종 교육정책을 내놓을 것이다. 과거를 점검해 보면 걱정을 피할 수 없다. 지난 정부에서 개발한 국가영어능력평가시험(NEAT)이 이번 정부에서 ‘불투명한’ 이유로 사라졌다. 원래는 201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부터 NEAT가 외국어영역(영어) 시험을 대체하기로 돼 있었다. 교육계의 일부 우려나 반발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영어 교육이 말하기와 쓰기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인식하에 선생님들이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수능을 대체하려던 계획은 전면 취소됐다. NEAT는 2015년 아예 폐지됐다.

경제 분야 포퓰리즘 공약과는 달리 교육 포퓰리즘에 대해서는 국민·유권자가 상대적으로 둔감하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국가경쟁력을 결정하는 것은 교육이다.

한 영문학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영어 교육 정책 변화에 교육자들의 생각이 반영되지 않았다. 정책 변화를 결정하는 것은 정치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정치인들이었다.” 이번 대선에 나선 출마자들과 그들 캠프의 참모들은 어떤 교육 정책을 내놓을 것인가.

김환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