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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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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어디 꽃을 기다리는 게 강호 잡배들만이랴. 나도 그렇다. 운명이 붙여준 내 이름은 그네. 지금은 불통여제로 불리지만 과거엔 얼음 공주라 칭송받았다. 나는 이 나라의 무림지존, 지금은 비록 몸이 꺾였으나 마음은 아니다. 어림없다. 내 다시 금제를 풀고 지존좌에 돌아가는 날, 강호는 알게 되리라. 감히 무림의 여제를 능멸한 죄, 하늘이 용서치 않음을. 목련이 피면 알게 되리라. 벚꽃 대전? 너희들끼리 꾸다 말 한바탕 꿈인 것을.

촛불엔 태극기로 맞불
나라 둘로 갈릴수록 유리

승패란 정치에서 기약할 수 없는 일이니(勝敗政治事不期)
수치를 안고 견디는 것이 여장부라네(包羞忍恥是女兒)
태극기 든 늙은이 중 충성파 많으니(太極老輩多忠情)
꺼진 불이 다시 살아날 줄 누가 알겠는가(死灰復燃誰可知)
   -당나라 시인 두목의 ‘오강의 정자’에서 빌려옴

오늘은 예순다섯 번째 생일. 반겨 찾는 이 하나 없다. 구중에 묻힌 지도 벌써 두 달째. 무공이 금제된 몸은 쉽게 한기를 느낀다. 지난 몇 달이 꿈만 같다. 무력(武曆) 2016년 12월. 믿었던 친박무리마저 배신했다. 야도의 무리들과 결탁했다. 중과부적, 꼼짝없이 당했다. 돌아보면 너무 바보 같았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 시녀 순실의 잘못을 인정하지 말았어야 했다. 아무리 절친이라 한들 딱 잘랐어야 했다. 두 번, 세 번 사과하지도 말았어야 했다. 촛불은 시작부터 꺾어놨어야 했다. 특감도 받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렇게 무기력하게 무림 판관의 처분만 바라는 신세는 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야. 꺼진 재도 다시 불을 피우는 법.

그들은 춘삼월, 개나리가 필 때 나의 무공을 영원히 폐지하려 한다.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방법은 하나, 이이제이, 이(以)태극 제(制)촛불이다. 강호를 둘로 쪼개야 해. 나라는 망하고 경제는 파괴되겠지만 내 알 바 아니야. 지난주 강호TV의 논객을 불러 대담을 나눈 것도, 다 노림수가 있어서야. 처연하고 쓸쓸해 보일수록 좋아. 만천과해(瞞天過海), 하늘을 속이고 바다를 건너며, 포전인옥(抛磚引玉), 벽돌을 던져 옥을 얻는 법. 보수논객 정노필(老筆)이란 벽돌이 민심이란 옥을 불러올지 누가 알겠는가. 그렇게만 되면, 그래서 내가 지존좌를 되찾기만 하면….

이미 천하 십적의 명단을 마음에 품고 새기는 터다. 무림 특별감찰의 수괴부터 무림TV와 신문, 무림의회, 관가의 아첨꾼들, 쓸개 없는 재벌들까지… 모조리 손 보리라. 어김없이 배신과 음모의 죗값을 치르게 하리라. 그러나 이런 마음을 들켜선 안 된다. 온 천하가 짜고 나를 생매장하려 한다. 나의 부활을 바라는 이는 강호 천지에 단 한 명도 없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한다. 여차하면 직접 태극기를 들고 광장에도 나갈 것이다.

하지만 겁도 난다. 이러다 영원히 무공을 잃게 되면? 그래서 무림옥에 영영 갇히면? 다시는 햇빛을 보지 못하게 되면? 두렵다. 그럴수록 더 강호를 두 쪽 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때가 되면 기꺼이 수갑을 찰 것이다. 죄수의 옷을 입고 족쇄에 묶여 끌려갈 것이다. 골고다의 예수처럼. 그리하여 강호에 더 거대한 극단과 배제의 피바람을 일게 할 것이다.

그러지 말고 포기하라고? 나라를 위해 모든 걸 내려놓으라고? 나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소리다. 종필노사가 일찍이 말하지 않았던가. “그네는 강호인 5000만이 몰려와도 꿈쩍 않을 사람”이라고. 부모를 비적의 칼에 잃고도 지존좌를 거머쥔 나다. 84일의 천막 당사 풍찬노숙도 이겨냈다. 내게 시련은 있어도 절망은 없다.

현직 무림지존을 옥에 처넣는 일은 무림사에 없었다. 강호의 태극바람이 결코 이를 묵과하지 않으리라. 공멸의 공포가 강호를 덮치리라. 엎친 데 덮친 격, 제국의 깡패 트럼프와 왜국의 아베, 대륙의 시진핑이 강호를 쥐락펴락 몰아칠 것이다. 둘로 갈린 강호는 결코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니 누구든 다음 무림지존이 되려는 자, 내 허락 없이는 권좌를 쥐지 못하리라. 그때야 알게 되리라. 시간은 촛불의 편이 아니란 것을. 목련이 피면 세상이 바뀐다는 것을.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