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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의 몰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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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최상연
최상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최상연 논설위원

최상연
논설위원

설 연휴엔 대선 얘기가 풍성했지만 김영란법도 제법 많이 거론됐다고 한다. 소비 절벽, 인구 절벽 앞에 시름 깊은 경제다. 주고받은 설 선물이 눈에 띄질 않으니 걱정 겸한 안줏거리가 된 모양이다. 사실 김영란법은 이명박(MB) 정부 때 만들어졌다. 국민권익위원회가 그때 생겼는데, 출범 때부터의 역점 과제였다. 김영란 권익위원장 전임인 이재오 위원장이 ‘현실성 없다’고 치워버려 일단 끝났다가 김 위원장이 국무회의 안건으로 올리고 MB가 거들어 부활했다.

보수의 미래 망친 박 대통령
적반하장으론 수렁만 깊어져

신기한 건 좋든 나쁘든, 사람이든 정책이든 MB 손만 타면 오물 취급하던 박근혜 대통령이 이 법은 그냥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뚜렷한 업적이 없던 차에 ‘n분의 1’ 정착을 박근혜 정부의 간판 상품으로 내세우려 했다는 얘기가 많다. 한심한 건 이런 얼굴 사업이 겨우 시행 100일 만에 같은 정부에 의해 수술대에 올랐다는 점이다. 여당까지 가세해 ‘내수 부진이 김영란법 때문’이라고 몰아세우는 걸 보면 마치 기다렸다는 투다. 이 정도 예상이야 못한 게 아닐 텐데.

법 자체가 희화화돼 한국 사회를 바꿀 동력을 잃었다는 게 진짜 속내에 가까울 게다. 비싼 밥 먹지 말라는 건 그 자체가 김영란법의 목적은 아니다. 부정 청탁을 없애 깨끗하고 공정한 사회로 가자는 게 핵심이다. 취지가 훌륭해 국민 85%가 여전히 지지하는 이 법안은 그러나 출발부터 절뚝거리는 신세가 됐다. 법의 최고 집행자인 박 대통령 스스로가 부정 청탁의 한복판에 섰기 때문이다. 학생이 교수에게 갖다 준 캔커피까지 단속해야 할 경관의 뒷머리가 조금 많이 화끈거리지 않겠는가.

기우뚱거리는 업적이라면 또 있다. 세종시야말로 박 대통령의 고집이 세운 도시다. 언제나 차 속이란 길과장·길국장·차관(車官)이 양산됐다. 김영란법 핑계로 사람 만나는 걸 피한다는 기러기 공무원들은 자기들끼리 세종시 노래방에서 방마다 ‘광화문 연가’란다. 박 대통령이 이런 코미디를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다. 대안으로 ‘화상 회의’를 거론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가 화상 국무회의를 주재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다수결 원리에 따른 책임 정치를 실종시킨 국회선진화법은 압권이다. 취지를 살리자면 선진화법이 굴러갈 수 있는 대화와 타협의 정치 문화를 수입하는 게 우선이다. 대다수 의원이 반대하는데도 부득부득 우겨 법을 만들어 놓곤 반대편은 전염병 환자 취급하듯 외면한 게 박근혜 정치다. 그 결과는? 정치를 정치가 못 풀고 줄줄이 재판소행이다. 김영란법, 신행정수도특별법, 선진화법이 모두 헌재 법정에 섰다.

불임·무능 국회에, 길에서 겉도는 행정부, 공직자·교원·언론인의 지식 네트워크 붕괴가 보수 정치인 박근혜의 작품이다. 그 외엔 별로 내세울 것도 없다. 대통령 소재를 모르는 국가안보실 육군 중령이 보고서를 든 채 자전거로 이리저리 날랐다는 청와대다. 알고 보니 이상한 사람들끼리 모여 실세라고 시시덕거리고, 뒤엔 깜냥도 안 되는 최순실씨가 든든한 배경이었는데, 돈까지 챙겼다는 거다. 그런 최순실 게이트를 박 대통령은 “거짓말로 쌓아 올린 커다란 산”이라고 강변했다. 그러면서 또다시 보수와 태극기를 내세웠다.

세종시와 선진화법이 보수는 아니다. 그냥 포퓰리즘 정치다. 나라를 사랑하자고 국민에게 감히 요구하는 게 보수다. 그러려면 보수 지도자는 희생의 모범을 보이는 게 먼저다. 식물 나라를 만들어 놓곤 애국심에, 무고함을 강변하니 참 대략난감이다. 골병 들어 몸져누운 보수를 억지로 일으켜선 한 번 더 걷어차는 꼴이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한 방에 무너진 게 세상 물정 모르는 외교관이어서만은 아니다.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얘기는 들어봤다. 그러나 부패한 데다 찢기고, 무능한 데다 거짓말까지 하는 보수는 들어본 적이 없다. 보수가 무너지면 건강한 진보도 무너진다. ‘대한민국과 결혼했다’는 게 사실이라면,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위해 정치에 나섰다는 진짜 보수 정치인이라면 박 대통령은 이쯤에서 보수가 살 길을 열어줘야 한다. 산 같은 거짓말로는 길을 만들 수 없다.

최상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