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view &] 지금 한국인에겐 휴식이 필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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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리 메리츠자산운용 대표

존 리
메리츠자산운용 대표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수험생에게 격언처럼 회자 되는 말이 있었다. ‘4당 5락’이었다. 4시간을 자면 대학에 붙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의미였다. 당시엔 그럴듯한 얘기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한참 잘못됐다. 잔인한 말이기도 하고. 인간의 뇌는 오랜 시간 무언가에 집중할 수 없도록 설계돼 있다. 책상에 오래 앉아 있어봐야 제대로 학습하는 시간은 제한적이다. 잠을 충분히 자고 짧은 시간에 집중해서 공부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얘기다. 핀란드의 고등학교가 하루 4시간만 정도만 수업을 하는 데는 이런 이유도 있다.

고3 수험생 ‘4당 5락’은 잘못된 얘기
충분히 잠 자야 아이디어 샘 솟아
‘일’은 없고 ‘근무시간’만 있는 현실
휴가 보장하고 사장·부장부터 쉬자

허핑턴포스트 창업자인 아리아나 허핑턴은 숙면 캠페인을 펼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수면 혁명(The Sleep Revolution)』이란 책을 펴내기도 했는데 ‘숙면이 행복과 성공의 필수 요건’이라는 게 그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그는 특히 경쟁에 살아남기 위해 잠을 자는 시간을 줄이는 걸 경계한다. 수면 부족이 목표를 성취하고, 성공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처럼 생각하지만 잠을 못 자면 좋은 아이디어나 창의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어 오히려 손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실제로 수면 시간은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다. 그동안 뇌의 기억력이 회복되고, 신경학적 독소 제거 활동이 일어난다. 이를 통해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 최근의 연구 결과다.

그러나 한국은 이 휴식의 중요성을 간과한다. 초등학생부터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게 이 나라의 현실이다. 요즘은 어느 동네를 가든 신나게 뛰어 노는 아이들을 보기 힘들다. 초등학생도 아침 8시에 집을 나가면 밤 12시가 넘어서야 학원 순회를 마치고 귀가한다고 한다. 밖에서 뛰어 놀아야 할 아이들이 하루 종일 콘크리트 건물 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 몸이 갇히면 생각도 갇히게 마련이다. 피곤에 지친 아이들은 주변에 관심을 둘 여유도, 호기심을 가질 틈도 없다. 피곤한데 스트레스 쌓이니 잠을 못 이룬다.

한국 기계적 교육 시스템은 자연히 기계적 아이들을 양산한다. 당장 시험점수가 중하니 부모도 욕심을 낸다. 실컷 놀아도 시간이 부족한 아이들이 선행학습이니 뭐니 사교육에 내몰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수면이 부족한 사람은 짜증이 많고, 공격적인 성향을 나타낼 가능성이 크다.(『수면 혁명』) 나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왕따 문제의 근본적 원인도 아이들의 ‘쉼 없는 삶’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계적 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우물 밖으로 나오기 힘들고, 새로운 생각보단 정해진 답을 찾는 경우가 많다. 나이가 들어도 시험 보는 것에 익숙해져 본인의 경쟁력과는 무관한 스펙 쌓기에 열중한다.

그런 교육을 받고 어른이 됐다. 생각이 바뀔 리 없다. 흔히 말하는 ‘꼰대’ 문화라는 건 별 게 아니다. ‘나는 그랬는데 너희는 왜 안 그러니?’ 이것이 출발점이다. 이는 불합리한 기업문화로 이어진다. 아침에 출근해 저녁까지 일했는데 그 걸로도 부족해 야근을 한다. 그랬으면 집에 가서 쉬어야 하는데 회식을 한다. 주말에 출근하는 것도 다반사다. 상급자가 퇴근하지 않으면 집에 가는 것도 눈치를 보는 게 한국 회사다. 휴식을 해야 능률이 오르는 것이 당연한데도 여전히 너무 많은 시간을 직장에서 낭비한다. 그것도 타의에 의해서. 자연히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줄어든다. 행복도 느낄 겨를이 없다. 행복하지 않은 직원이 많으면 회사가 성공할 가능성도 낮아진다.

한국이 보다 높은 단계로 도약하려면 이제부터라도 휴식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쉬는 것도 습관이다. 우선 수면시간을 늘리자. 한국 국민의 하루 평균 수면시간은 7시간41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다. 최근 5년간 불면증 진료를 받은 사람도 193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아이들부터 실컷 재우자. 몸이 힘들 게 맘껏 뛰어 놀게 하자. 공부하는 시간 조금 줄이고, 본인이 하고 싶은 것에 시간을 쓰도록 만들자. 부모는 사교육 말고 거기에 돈을 투자하자. 기업문화도 이제 근간을 흔들어야 한다. 지금은 ‘일’을 하는데 중심엔 ‘일’이 없고 ‘근로시간’만 있다. 근로시간이 생산성을 결정하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 기업이 직원의 휴식, 휴가를 더 적극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휴식이 늘수록 사람들은 행복해진다. 사장, 부장, 팀장부터 좀 쉬자.

존 리 메리츠자산운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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