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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반기문 불출마, 정치 교체 밑거름 되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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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어제 전격적으로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지난달 12일 귀국 후 불과 20일 만의 중도 하차다. 지지율 폭락에 대선 전 개헌을 매개로 한 소위 ‘빅 텐트’에 탄력이 붙지 않자 진흙탕 싸움을 견디지 못했다. ‘제3지대론’으로 부상했다가 대선 레이스 중 사퇴한 고건 전 총리의 선례를 극복하지 못한 셈이다. 그를 중심으로 한 연대·연합으로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맞서려던 범여권의 대선 전략엔 큰 차질이 생겼다.

대통합·정치 교체란 한국병 진단은 옳아
리셋 비전·리더십으로 승부하는 계기 돼야

 반 전 총장은 여권의 가장 유력한 대선 주자였다. 그럼에도 그의 낙마는 어느 정도 예견된 결과라 할 수 있다. 경제와 안보의 복합 위기에 리더십 실종까지 겹친 대한민국은 지금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반 전 총장이 가장 높은 지지율을 오랜 기간 유지했던 건 그의 글로벌 정치 경험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엄혹한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활로를 찾는 데 그의 경륜이 도움이 될 거란 믿음이 ‘반기문 대망론’을 만들었다. 하지만 귀국 후 정치인 반기문이 보여준 역량과 비전은 그런 기대에 걸맞은 게 아니었다.

 그는 대통합과 정치 교체를 귀국 일성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현실적 처방은 제시하지 못했다. 정치 교체를 하려면 다양한 스펙트럼의 참신한 인재를 영입해야 할 텐데 그의 주변 인사는 그렇지 못했다. 기존 정치인을 찾아다니며 연합이니 연대니 하는 옛날식 정치를 하면서 새 정치를 주장하니 공감을 얻지 못했다. 지역주의에 기대거나 진영에 의지하는 모습도 보였다. 지역·진영·패권을 뛰어넘는 가치를 내걸고 새로운 사람들이 기존 정치판을 확 바꿨으면 좋겠다는 게 그에 대한 기대였지만 반 전 총장은 새 길을 걷지도 펼쳐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우리의 현 상황이 총체적 난국이고 위기의 주범은 정치라는 그의 진단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사람은 없다. 현실은 오히려 반 전 총장이 말한 것보다 훨씬 절실하다. 이념·세대·계층·지역으로 찢긴 대한민국은 식물 대통령에다 전쟁 같은 정쟁으로 표류하고 있다. 이런 정치에 지칠 대로 지쳐 절반이 넘는 국민이 보수든 진보든 어느 쪽에도 마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패권과 기득권을 청산해야 나라에 살 길이 열린다고 믿는다.

 역설적이지만 정치 교체를 주장한 반 전 총장의 낙마는 정치 교체를 위한 계기로 삼아야 한다. 대한민국을 어떻게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지에 대한 비전과 가치를 다투는 선거로 탈바꿈시켜야 한다. 이리저리 유리한 쪽으로만 발을 걸치는 기회주의적 모습은 끝내야 한다. 국가의 존망이 걸린 안보 이슈나 망국적 지역감정을 이용해 표를 구하려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

   특히 그의 불출마로 범여권에선 두 자릿수 지지율을 얻은 대선 후보가 단 한 명도 없는 형국이 됐다. 유권자들이 병든 보수에 그만큼 크게 실망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라도 범여권은 오로지 병든 보수를 치유하고 통합할 건강한 보수의 비전으로 승부해야 한다. 나라의 적폐를 걷어내고 새 나라로 리셋할 비전과 리더십을 보여야만 민심이 움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