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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구’된 500년 한과 … 권씨 집안 며느리들 손맛 좀 보시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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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경북 봉화 ‘한과촌’ 닭실마을

지난 20일 경북 봉화군 닭실마을 한과 작업장에서 안동 권씨 집안 며느리들이 한과를 만들고 있다. 이틀을 건조시킨 찹쌀 반죽을 기름에 지지듯 튀기는 작업이 한창이다. 설 기간에만 전국에서 3500상자 주문이 들어왔다. 박정자 마을 부녀회장(맨 오른쪽)이 완성된 유과 세트를 들어 보이고 있다. [봉화=프리랜서 공정식]

지난 20일 경북 봉화군 닭실마을 한과 작업장에서 안동 권씨 집안 며느리들이 한과를 만들고 있다. 이틀을 건조시킨 찹쌀 반죽을 기름에 지지듯 튀기는 작업이 한창이다. 설 기간에만 전국에서 3500상자 주문이 들어왔다. 박정자 마을 부녀회장(맨 오른쪽)이 완성된 유과 세트를 들어 보이고 있다. [봉화=프리랜서 공정식]

전국에 폭설이 내린 지난 20일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에도 눈이 쌓였다. 닭 유(酉) 자에 고을 곡(谷) 자를 쓰는 유곡리는 한글로 쓰면 ‘닭실마을’이다. 마을 사람들은 ‘달실마을’이라 부른다.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 한가운데 ‘ㄱ’자 형태의 한옥 하나가 있다. 멀리서 보면 산자락 아래 자리한 산사(山寺) 같다. 500년 전통 한과로 유명한 닭실한과를 만드는 곳이다.

권벌 선생 제사 모시며 상에 올려
16세기부터 전통 이어져 유명세

완전 수작업 … 전엔 눈물깨나 흘려
닭의 해 주문 폭주하며 즐거운 비명

이번 설 기간에만 3500상자 주문
막내가 예순 … 대 끊어질까 걱정도

창호지 발린 여닫이문을 열고 들어섰다. 고소한 냄새가 코를 덮쳤다. 안동 권씨 며느리들이 반죽을 기름에 지지면서 나는 향이다. 고즈넉한 바깥 풍경과 달리 건물 안은 분주했다. 60~70대 며느리들이 이 방 저 방 옮겨 다니며 한과를 만드는 데 여념이 없었다. 기자가 말을 걸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요! 바빠 죽겠니더”란 꾸지람이 돌아왔다. 이번 설 기간에만 한과 3500상자 주문이 몰렸다.

닭실마을 한과가 유명해진 것은 충재 권벌(1478~1548) 선생의 제사를 모시면서다. 충재 선생은 기묘년인 1519년 사화(士禍)에 휘말리고 이듬해 낙향해 닭실마을에 터를 잡았다. 충재 선생은 기묘·을사사화를 겪으면서도 선비의 지조를 지켜 조선 선조 때 ‘불천위(不遷位)’ 반열에 올랐다. 불천위는 보통 4대까지만 제사를 지내는 관례에서 벗어나 영원히 제사를 받들도록 나라에서 허락한 것을 말한다. 지금도 매년 음력 3월 23일 충재 선생의 부인인 화순 최씨, 26일 충재 선생 불천위 제사가 치러진다. 지금 살고 있는 75가구 중 대부분이 충재 선생의 지손(支孫)이다. 권씨 집안 며느리들이 제사상에 올리는 한과도 긴 세월 제사상에 오르면서 유명해졌다.

닭실한과는 기본 반죽부터 옷을 입히는 마무리까지 모두 수작업으로 만들어진다. 한옥 안에 있는 6칸의 방에서 각 공정이 이뤄지는 구조다. 25㎡ 남짓한 첫 번째 방은 건조장이다. 유과를 만들 반죽이 이곳에서 건조된다. 불린 찹쌀을 빻아 체로 친 뒤 반죽한다. 반죽을 조금씩 떼어내 밀대로 민다. 납작해진 반죽을 방바닥에 일일이 깐다. 뜨끈한 방바닥 위에서 반죽이 다 마르는 데 꼬박 이틀이 걸린다. 이날 반죽을 방바닥에 까는 일은 며느리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이영자(78) 할머니가 맡았다. 이 할머니는 19세 때 안동에서 시집와 60년간 한과 만드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땐 불천위 제사 전날 3월 시무이틀(22일)이랑 시무닷새(25일)에만 한과를 만들었는데도 힘이 들고 어려버가 눈물이 쏙 빠짔다 아이가.”

바싹 마른 반죽은 옆방으로 넘어간다. 이곳은 반죽을 기름에 지지듯 튀기는 곳이다. 전기 프라이팬에서 달궈진 식용유에 반죽을 집어넣으면 금세 부풀어 오른다. 반죽이 둥글게 부풀지 않도록 며느리들이 양손에 주걱을 쥐고 지지듯이 꾹꾹 눌러 준다. 반죽이 기름에 들어갔다 나오면 어른 손바닥만 하던 것이 5배는 커진다. 이 과정을 마치면 흔히 볼 수 있는 유과의 모습을 갖춘다. 과거 전기 프라이팬이 없을 땐 가마솥 뚜껑을 썼다. 이 기름방엔 며느리들 중 가장 경력이 짧은 이명숙(67) 할머니가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서울에서 살다 2009년 남편 고향인 닭실마을로 내려왔다. 이 할머니는 “아직 경력이 7년 남짓밖에 안 된 신참이어서 그저 흉내 내는 정도만 하고 있다”고 수줍어했다.

다음엔 유과에 옷을 입힐 차례다. 기름을 털어낸 유과에 조청을 펴 바르고 튀밥이 가득 담긴 통에 넣는다. 겉에 튀밥이 잔뜩 묻는다. 유과에 색을 입히고 싶을 땐 튀밥 대신 지치(분홍색)나 흑임자(검은색)를 끼얹는다. 그렇게 3색 옷을 입은 유과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고 흰색 꽃을 얹는다. 튀긴 찰벼로 꽃잎을, 건포도로 꽃술을 만든 꽃이다. 이렇게 만든 유과는 부드러우면서도 달콤한 맛이 일품이다. 특히 찹쌀로 반죽한 덕에 여느 유과보다 식감이 훨씬 쫀득쫀득하다.

<b>500년 이어 온 닭실마을 한과 탄생 과정<br> ① 반죽을 말린다</b> 찹쌀 반죽을 조금씩 떼어 납작하게 만든 뒤 방에서 이틀을 말린다.

<b>500년 이어 온 닭실마을 한과 탄생 과정 ② 기름에 지진다</b> 말린 반죽을 식용유에 넣어 지진다. 양손에 주걱을 들고 눌러줘야 한다.
<b>500년 이어 온 닭실마을 한과 탄생 과정 ③ 겉옷을 입힌다</b> 유과 겉면에 조청을 펴 바른다. 튀밥이나 지치, 흑임자를 입혀 색을 낸다.
<b>500년 이어 온 닭실마을 한과 탄생 과정 ④ 장식을 더한다</b> 유과를 먹기 좋게 자르고, 튀긴 찰벼와 건포도로 꽃장식을 만들어 꾸민다.

닭실한과의 맛이 전국에 소문나면서 주문량도 갈수록 늘고 있다. 설이나 추석 명절엔 한옥 앞마당에 우체국 택배 차량이 매일 드나든다. 이날도 택배 차량 짐칸에 실린 박스에 경기도 성남시, 경남 창원시 등 전국의 지명이 적혀 있었다. 지난 1993년엔 며느리들이 ‘닭실종가 전통유과’란 이름으로 마을기업을 설립하기도 했다. 봉화군 최초 마을기업이다. 권영조(70) 닭실마을 이장은 “다른 곳에선 기계로 한과를 만드는데 닭실마을은 옛날 방식 그대로 전통을 지키면서 한과를 만들어 더욱 인기를 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유명세를 몰아 닭실마을에선 가문의 제사·다과예절 교육과 종가·고택 체험 등 관광상품도 마련해 방문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하지만 며느리 10명이 수작업으로 한과를 만드는 탓에 생산량에는 한계가 있다. 하루에 많이 만들어야 30~40박스 정도다. 게다가 올해는 닭의 해인 정유년(丁酉年)이어서 닭실한과의 주문량이 늘었다. 박정자(64) 마을 부녀회장은 “요즘도 매일 문의 전화가 오지만 ‘더 이상 주문을 받지 않는다’고 답할 수밖에 없어 죄송스러운 마음”이라고 전했다.

일손이 턱없이 부족하지만 이 마을 남자들은 얼굴 한 번 비치지 않는다. 이곳에선 안동 권씨 며느리들이 닭실한과 생산을 책임지는 게 당연한 일이다. 남자들은 작업장에서 50여m 떨어진 경로당에 모여 수다를 떨며 하루를 보낸다. 한과 포장 작업을 하고 있던 김숙진(62·여)씨는 “아저씨들은 원래 논다. 한과 만들 줄을 모른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지난 500년간 이어진 분위기다. 그래도 남자들은 충재 선생이 지은 청암정(靑巖亭)과 선생의 유적지를 도맡아 관리한다.

설 명절을 무사히 넘기면 닭실마을 며느리들은 한숨 돌리게 될 터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며느리들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10여 년 전만 해도 30명 가까이 있었던 안동 권씨 며느리들의 대가 끊기고 있어서다. 지금 남은 며느리의 수는 10명. 가장 나이가 어린 며느리가 예순이다. 마을엔 시집올 며느리는커녕 새로 장가를 갈 총각도 없다. 박정자 회장은 “아직 끝이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닭실한과 500년 명맥이 끊어지게 될까 봐 걱정이다”면서 “안동 권씨 후손들이 힘을 모아 마을 전통을 이어 갈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봉화=김정석 기자 kim.jung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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