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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잡 뛰고 할랄 인증받고, 영광굴비상인들 생존 몸부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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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를 사흘 앞둔 24일 전남 영광군 법성면 굴비거리가 한산하다. 프리랜서 오종찬

설 연휴를 사흘 앞둔 24일 전남 영광군 법성면 굴비거리가 한산하다. 프리랜서 오종찬

24일 오후 전남 영광군 법성면. 도로를 따라 길게 자리잡은 상점마다 굴비가 내걸려 있었지만 손님들의 발걸음은 뜸했다. 굴비와 함께 영광의 또 다른 특산품인 모싯잎송편을 함께 판매하는 상점들 역시 한산한 모습이었다.

해마다 명절 때면 손님들로 북적였던 영광굴비 업계가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금지법)과 불황이 맞물리면서 위기를 맞은 것이다. 상인 김병국(51)씨는 "굴비만 팔아서는 수입이 날로 줄어드는 탓에 우리처럼 송편을 함께 팔거나 아예 다른 일에 뛰어드는 상인들도 많다"고 말했다.

김영란법 시행 이후 첫 명절인 설을 맞아 영광 법성포 상인들이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하고 있다. 선물용 상품 가격대가 주로 10만~20만원선인 영광굴비가 이번 설 대목에 큰 타격을 입고 있어서다.

굴비와 모싯잎송편을 함께 판매하는 김병국(51·왼쪽 첫번째)·황조연(45·오른쪽 첫번째)씨 부부. 프리랜서 오종찬

굴비와 모싯잎송편을 함께 판매하는 김병국(51·왼쪽 첫번째)·황조연(45·오른쪽 첫번째)씨 부부. 프리랜서 오종찬

가장 대표적인 변화는 굴비 상점을 운영하면서 다른 업종에 뛰어드는 일명 '투잡'이 늘어난 점이다. 기존 상점에서 굴비와 송편을 함께 판매하는 경우가 많다. 소형 마트 등을 함께 운영하기도 한다. "한발 앞서 굴비·송편 가게를 동시에 운영하던 상인들은 일명 '쓰리잡'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게 상인들의 설명이다.

굴비 판매와는 전혀 다른 업종으로 전환하는 경우도 속출하고 있다. 한 상인은 김영란법 시행 이후 중장비 기사로 전직했다. 가게를 정리한 돈으로 대형 트럭과 굴삭기를 산 뒤 공사 현장을 찾아다닌다. 또 다른 상인은 굴비 판매가 아닌 식당 운영을 하고 있다.

외국으로 활로를 넓히는 사례도 있다. 한 영어조합법인은 최근 한국할랄인증원으로부터 무슬림이 먹을 수 있도록 '할랄'(HALAL) 인증을 받았다. 영광굴비에 대한 할랄 인증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할랄 인증은 김영란법으로 한계에 부딪힌 국내 시장을 넘어 전 세계 인구의 25%(16억여 명)에 달하는 무슬림들에게 영광굴비를 수출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업체는 보고 있다.

굴비 판매만 계속하는 상인들도 자구책 마련에 나섰다. 김영란법상 선물이 가능한 5만원에 맞춘 상품을 출시하는 사례가 많지만 상품성이 크게 떨어져 찾는 고객들은 많지 않다. 상인 김희훈(53)씨는 "예년 이맘 때면 가게마다 택배 상자에 테이프를 붙이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퍼질 정도로 분주했다"며 "요즘엔 장사가 되지 않아 가게마다 오후 6~7시가 되면 영업을 끝낸다"고 말했다.

모든 상인들이 변화에 발빠르게 대응하며 적응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상당수 상인들의 경우 김영란법 시행 이후 가계를 정리하거나 업종 전환을 고심하는 경우가 잇따르고 있다. 영광굴비협동조합에 따르면 법 시행 이후 20여 곳의 상점이 가게 문을 닫았다. 일부 상인들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생활 터전이었던 법성포를 떠나기도 했다.

폐업은 영세상인들만의 일이 아니다. 굴비 생산 규모가 한 해 50억원대로 법성포 2위였던 한 업체의 경우 얼어붙은 경기에 김영란법까지 겹쳐 지난해 가을 폐업했다. 해당 업체에서 굴비 엮기와 포장을 하던 주민 수십 명도 직장을 잃었다.

영광굴비협동조합 배현진(61) 이사장은 "법성포는 한 해 4000억원의 굴비가 판매되는 곳으로 단순히 상업지역을 넘어 1000년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라며 "정부와 지자체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는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상인들의 생존을 위한 지원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호 기자 kim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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