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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망각·사랑…‘로코 킹’ 공유가 퍼뜨린 도깨비 판타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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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tvN 금토드라마 ‘도깨비’에서 도깨비 김신과 도깨비 신부 지은탁 역으로 열연한 배우 공유와 김고은. [사진 tvN]

tvN 금토드라마 ‘도깨비’에서 도깨비 김신과 도깨비 신부 지은탁 역으로 열연한 배우 공유와 김고은. [사진 tvN]

tvN 금토드라마 ‘도깨비’가 끝났다. ‘공깨비’가 더 이상 우리를 찾아오지 않는다니, 검 뽑힌 김신(공유 분)을 떠나보내던 그때의 은탁(김고은 분)에 빙의되는 심정이다. 유난히 춥고 분노할 일이 많은 올 겨울, 이 드라마는 우리에게 드문 위로였다. 로맨틱코미디 특유의 달콤함과 잠시나마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판타지의 효능 때문만은 아니었다. 즐거이 시청하고 있다가도 언뜻언뜻 삶과 죽음, 기억과 망각, 존재의 저 근원적 쓸쓸함에까지 닿는 사유의 순간을 제공하기도 한 이런 드라마는 흔치 않았다.

드라마 ‘도깨비’ 최고 시청률로 종영
신은 기회를 줄 뿐, 선택은 인간 몫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 것인가 물어
대중적 재미와 인문학적 깊이 조화

21일 케이블 드라마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마지막 회는, 이 드라마가 지속적으로 추구해 온 인간의 기억과 선택에 관한 결정적 에피소드로 채워졌다. 은탁이 유치원버스의 사고를 막기 위해 자신의 차를 세우고 죽음을 맞이한 장면은, 김신이 검을 뽑고 사라지던 그 순간과 함께 이 드라마의 하이라이트였다. 그 둘 모두 선택과 의지의 시험에 드는 순간이었다. 김신에게는 악을 처단함으로써 정의를 수호할 도구인 검이 주어졌다면, 인간인 지은탁에게는 자신의 몸을 던져 다른 인간의 불행을 막을 것인가 홀로 그 화를 피해갈 것인가 하는 찰나의 선택권이 주어져 있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드라마의 서사는 결국 인간에 대한 질문, 지금 이곳에서의 삶에 대한 메시지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신은 인간에게 기회를 줄 뿐 선택은 우리가 한다는, 극 중 신의 대사처럼 말이다.

고려에서 무신으로 활약한 김신.

고려에서 무신으로 활약한 김신.

‘도깨비’는 신과 인간의 이야기에 기대, 또 로코와 판타지라는 어법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야기했다. 생은 유한해서 그만큼 더 아름다우며, 살면서 가장 해볼 만한 일은 물론 사랑이라고. 간절히 바라고 그리워하면 결국 다시 만날 수 있으며, 기억하는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또 무엇을 잊고 어떤 것을 기억할지 선택과 의지의 문제가 우리의 존재조건을 다르게 구성한다는 것도 보여줬다.

은탁의 선택은 이 생에서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망자에게 주어지는 망각의 차를 마시지 않았다.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주는 배려였지만, 그녀는 김신을 결코 잊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환생한 은탁은 결국 그 기억의 힘으로 김신과 재회하고 드라마는 해피엔딩에 이르렀다. 처음 시작할 때엔 가벼운 로맨틱코미디의 변형일 것이라 예상했던 드라마 ‘도깨비’는 이처럼 행과 불행 사이,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가 분명치 않은 판타지적 세계관을 구축하고, 그 속에서 다시 지금 이곳에서의 생과 사와 망각과 기억에 대한 사유로까지 이끌어준 것이다.

김신은 900년을 기다린 끝에 불멸의 삶을 끝내줄 신부를 만났다.

김신은 900년을 기다린 끝에 불멸의 삶을 끝내줄 신부를 만났다.

언젠가 그 자신도 언급한 바 있듯 김은숙은 ‘대중작가’다. ‘파리의 연인’에서 시작해 ‘시크릿 가든’ ‘신사의 품격’, 그리고 지난 해 ‘태양의 후예’에 이르기까지 흥행불패의 신화를 써왔으며, 무엇보다 ‘말맛이 살아있는 찰진 대사’로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런데 ‘도깨비’는 이미 검증된 그 대중적 감각에 인문학적 깊이가 절묘하게 결합돼 한단계 진화한 TV드라마의 경지를 보여줬다. 10대 소녀와 성인 남성의 사랑이야기를 마냥 편하게 즐길 수만은 없다는 견해와, 도깨비의 능력에 기댄 삶이란 결국 현실 도피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일부 있었지만, ‘도깨비’의 판타지적 요소들은 결코 도구적으로만 동원되지 않았으며 로맨스 역시 가볍게만 다뤄지지 않았다. 판타지와 로맨틱 코미디의 장르 문법을 적극 동원하되 그 둘을 적절히 변형해,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보면서 인간 존재의 근원적 조건들에 대한 사유의 순간을 경험하게 만들었다. 지나친 PPL의 개입으로 작가의 재능을 소비시켰다는 합리적 의심도 품어보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의 서사적 완성도와 대중문화 콘텐트로서의 가치는 훼손되지 않았다.

‘도깨비’는 로코 대가인 김은숙 작가가 내놓을 수 있었던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드라마가 아니었을까. 거기에 KBS ‘비밀’ 등을 연출했던 이응복 PD의 빼어난 영상감각과 연출, ‘로코의 제왕’임을 입증한 공유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이동욱의 재발견에 이르기까지 극본, 연출, 연기의 3박자가 맞아떨어졌다.

다음엔 얼마나 더 재미있고 새롭고 보다 진화된 드라마로 돌아올지, 대중은 이제 거의 은탁과 같은 마음으로 기대하게 될 것이다. 끝도 모를 무의 영역을 헤매던 김신처럼 작가에겐 그만큼 힘겨운 과제가 될 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고선희(서울예대 문예학부 극작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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