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인의 삶과 정신적 갈등 묘사|타계한 유진씨의 작품세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별세한 유진오씨는 해방이후엔 주로 학계와 정계에서 활동했지만 2O년대 후반부터 해방 전에 이르는 기간 중 그가 쌓아온 문학적 업적은 우리 문학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었다. 평론·희곡 쪽에서도 폭넓게 활약했지만 본령은 역사소설. 당시 소설가로서는 드물게 도시적 요소를 배경으로 삼은 것이 특징이다.
그의 대표작의 하나인『창낭정기』 (38)에서 『서울에 나서 서울서 자라난 나는 남들과같이 가끔가끔, 가슴을 졸이며 그리워할 아름다운 고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밝힌 작중인물의 고백처럼 그의 문학세계는 목가적이고 자유적인 공간보다도 인위적 환경으로서의 도시의 현실을 배경으로 한 도시인들의 정신적인 고뇌와 궁핍한 삶의 상황을 제시하고 있다.
이행석과 함께 동반작가로 활동했던 유씨는 20년대 말에서 30년대 전반에걸친 서울의 상황들을 작품에 담고 있다. 당시 문단을 휩쓸었던 프로문학의 영향 탓인지『빌딩과 여명』 (29) 『오월의 구직음』(29) 『여직공』 (31) 『형』(31) 『김강사와 T교수』(35) 『어떤 부처』(38) 『이혼』(39)등 도시생활의 물질적 속악성과 가난 및 정신적인 위축을 통해서 식민정책 하에서의 「병든 사회」가 펼쳐진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는 교양주의 지식인이 당면하는 정신적인 갈등과 여급·여직공 등 가족의 생계를 위해 사회의 희생물로 전락하는 여인들의 초상이 많이 제시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초기작품인 『스리』 (28) 『복수』 (28) 『삼면경』(28)『가정교사』 (29) 『여직공』(31) 등은 처절한 생활고에 시달리는 빈민계층의 삶을 경향적시각에입각해 다룬 작품들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흔히 소개되고 있는 단편『김강사와 T교수』 (35)는 프로문학의 퇴조기에 쓴 작품으로 물질적이고 식민지적인 악덕에 의해 한 나약한 지식인이 파멸하는 비극적인 일면과 식민지교육의 위장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1년간 직업을 얻지 못한 채 고등유민으로 고생하던 주인공 김만필이 대학시절 「문화비판원」의 일원으로 사상운동을 한 경력을 숨기고 S전문학교 독일어 강사로 취직하게되어 겪게 되는 환멸과 좌절을 해부한 소설이다.
짧은 문단생활 중 후반기에 집필한 『어떤 부처』 (38) 『치정』 (38)『나비』 (39) 등은 이른바「시정문학」 또는 「세태소설」로 경제적으로 무력한 도시 가족들의 문제와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부들이 남편의 존재를 숨기고 여급등 변칙적인 직업전선에 나서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또 주요 장편소설로는38년에 발표한 『화상보』가 있는데 이 작품은 당시 인텔리층을 휩쓸었던 허무주의를 심리적 배경으로 젊은 남녀의 애정편력을 묘사하고 있다.
프로문학을 했으나 조직에 가담하지 않음으로써 검거사건으로부터 피해를 보지 않았다 든가, 일제말기 조선문인협회 간부 멤버로 보국강연을 갖는 등 초기와는 달리 굴절된 자세를 보이기도 했던 유씨 자신과 마찬가지로 작품들은 질곡의 시대를 살아남기 위해 변신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아프게 담고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