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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외교 '상상력의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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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2006년 들어 러시아로부터 날아든 이런 일들은 국제사회가 새로운 상황에 직면했음을 보여준다. 러시아산 가스가 냉전기에도 별 탈 없이 유럽으로 흘렀고, 이런 에너지에 의존하는 문명적 발전을 과거 수십 년 동안 유럽이 진행해 왔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전쟁이 아닌 기후와 가격이라는 경제적 이유가 야기한 자원 흐름의 단절과 불규칙성이 국제정치에 던지는 질문은 매우 심각하다.

현재의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 인류는 한동안은 화석에너지에 더 의존해야 한다. 때문에 에너지 자원 부국과의 상호의존도는 각국의 외교정책 입안에 결정적 변수로 작용할 수도 있다.

20세기 혁명의 세기에 사람들을 동원했던 막강한 자원 중 하나는 이데올로기와 물리력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중국 공산당을 이끌었던 마오쩌둥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하지만 1973년 석유파동이 발생하자 "권력은 유전에서 나온다"는 새로운 경구가 만들어졌다.

석유파동이 발생했을 때 많은 분석가는 자원민족주의와 중동의 복잡한 이념충돌을 결합시켜 이를 제1, 2차 세계대전을 야기한 상징적 사건들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실주의적 국제정치학자로 명성을 날리던 한스 모겐소는 "군사적 권력이 천연자원을 기초로 한 경제적 권력과 분리되었다"는 점에서 인류 역사의 '미증유의 해'라고 정의했다.

모겐소의 말처럼 1973년은 자원이 국제정치에서 지구적 차원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과시한 해였다. 총을 사용하지 않고 피도 흘리지 않았지만 자신들을 무시하는 상대방의 외교정책을 약화시키고, 막대한 추가이익을 얻을 수 있음을 입증한 해였다. 미국을 비롯한 석유 수입국들은 석유파동의 결과로 수천억 달러의 추가비용이 산유국들에 흘러들어가는 것을 목격하면서도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18세기나 19세기에 이러한 일들이 발생했다면 강대국들은 그들의 우월적 군사력을 행사해 자원 부국의 행동을 제압했을 것이며 극단적인 경우엔 이들을 식민지화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군사적 권력과 경제적 권력이 본격적으로 분화를 시작한 시기라는 이유도 있지만, 석유를 수입하기 위해 추가로 지불할 비용이 분배되는 과정에서의 상호의존 때문인지도 모른다.

2006년 벽두, 유럽과 세계는 냉전 종식 후 처음으로 러시아로부터 새로운 청구서를 전달받았다. 천연가스를 매개로 한 수십 년간의 상호의존이 어느 정도의 추가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지를 테스트받은 것이다.

환경의 역습을 경고하는 전문가들의 우려가 많아지는 상황 속에서 이런 식의 상호의존이 시험받는 경우는 앞으로 점점 많아질 수 있다. 특히 수입 에너지에 거의 절대적으로 기댄 채 급격한 성장을 이룩한 한국 등 동북아 지역은 이러한 테스트에서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선 한국의 외교적 대응과 상상력이 과거에 갇혀서는 안 된다. 물리력만이 아닌 국제사회의 복잡한 상호의존과 절대적 영향력의 원천에 대한 심각한 고려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

김석환 순회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