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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박 피해자·뇌물 공여자 동시 가능…법리 논쟁 가열될 듯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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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박영수 특별검사가 지난 10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소재 특검 사무실에 들어가고 있다. 특검팀은 이르면 15일 삼성그룹 수뇌부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우상조 기자

박영수 특별검사가 지난 10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소재 특검 사무실에 들어가고 있다. 특검팀은 이르면 15일 삼성그룹 수뇌부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우상조 기자

대통령의 강요와 협박에 당한 피해자인가, 원하는 대가를 얻어낸 뇌물 공여자인가.

마무리 단계 삼성 뇌물 혐의 수사

삼성그룹 관련 박근혜 대통령 뇌물수수 혐의에 대한 수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면서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고민도 커지고 있다.

검찰 특별수사본부가 지난해 11월 최순실(61)씨, 안종범(57)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등을 구속 기소할 때 ‘피해자’로 규정했던 기업들에 뇌물 공여자라는 새로운 법률적 지위를 부여해야 하는 데 따른 것이다.

특검팀은 기업→미르·K스포츠재단→최씨→박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에서 기업의 역할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를 두고 장고에 들어간 모양새다.

당초 이재용(49) 삼성전자 부회장 소환 조사 직후 결정될 것으로 보였던 삼성그룹 수뇌부에 대한 신병 처리 방침을 14일까지 결정하지 못한 것도 특검팀의 고민의 폭과 수위가 넓고 깊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검은 14일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을 소환해 삼성그룹 뇌물 사건 관련 수사를 진행했다. [뉴시스]

뇌물죄는 공여자 있어야 성립

“(합병 지원을) 부탁한 적도 없고 대가를 바란 적도 없다.”

특검 수사 상황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돌아온 삼성그룹 관계자의 답은 특검팀의 고민과 맞닿아 있다.

삼성의 미르·K스포츠재단, 최씨에 대한 수백억원에 달하는 지원(뇌물)이 2015년 7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서 국민연금의 찬성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다는 수사팀의 큰 그림을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에게 뇌물죄를 적용하기 위해선 ‘필요적 공범’ 관계인 뇌물 공여자가 있어야 한다. 뇌물죄는 뇌물을 준 자가 있어야 성립하는 범죄라서다.

즉 삼성 측에 뇌물 공여 혐의를 적용하지 못한다면 박 대통령에게도 뇌물수수 혐의를 적용할 수 없다는 얘기다.

미르·K스포츠재단에 대한 지원이 순수한 사회공헌 활동이었고 대가를 요구한 적도 없다는 삼성 측 주장이 특검팀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이유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강한 압력 탓에 어쩔 수 없이 지원했다는 삼성 측 주장이 사실이어도 뇌물 공여 혐의를 적용하는 것 자체는 가능하다는 의견이 더 많다.

지난해 5월 대법원에서 배임증재 혐의로 유죄 확정 판결을 받은 유회원(67) 전 론스타 코리아 대표 사건이 그 예다.

외환은행과 외환카드 합병 과정에서 인위적으로 주가를 조작한 혐의(증권거래법 위반)로 기소된 유 전 대표는 2011년 8월 법정 구속된 상태에서 은밀한 제안을 받았다.

론스타 관련자들을 검찰에 고발하고 재판에도 증인으로 나서 강경한 발언을 쏟아내 ‘론스타 저격수’로 불렸던 당시 투기자본감시센터 장화식(54) 운영위원장이 “10억원을 주면 선처해 달라는 탄원서를 써주겠다”고 한 것이다.

망설이는 유 전 대표에게 장씨는 “제안을 안 들어주면 엄벌을 요구하는 수천 명의 탄원서를 제출하고 법정에 계속 강력한 행동을 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하기도 했다. 결국 유 전 대표는 “론스타 관련 비판 행위를 일절 중단한다”는 취지의 합의서를 받고 8억원을 건넸다.

검찰은 이 사건이 드러난 2015년 장씨를 기소하면서 유 전 대표도 돈을 건넨 혐의로 함께 기소했다. “고소를 취하해 주는 대가로 돈을 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법원도 유 전 대표에게 징역 4월에 집행유예 1년이라는 유죄 판결을 내렸다. 마지못해 금품을 제공했다 하더라도 ?거액의 돈을 제공한 점 ?부당한 제안을 공개하는 등 다른 선택권이 있는데도 이 방법을 택한 점 등을 감안하면 대가를 원하고 뇌물을 제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이 사건에 관여한 법원 관계자는 “공갈 협박의 피해자라 하더라도 대가를 적극적으로 요구한 측면이 인정된다면 뇌물 공여죄가 성립할 수 있다는 게 실무적으로 정착된 판례”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구속영장 청구 여부는 어떻게 될까.

전문가들은 삼성 측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대가를 요구했는지, 이와 관련한 증거와 정황들이 충분한지가 특검의 신병 처리 방침을 정하는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판사 출신인 최기영 법무법인 에이프로 변호사는 “통상 뇌물 공여자에겐 사건 내용 진술을 받고 죄질이 더 나쁜 뇌물 수수자만 구속하는 게 일반적인 수사 패턴인데 이 사건은 수수자인 박 대통령에 대한 수사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라는 특이점이 있다. 공여 금액이 큰 점, 사안의 중대성 등을 고려해 판단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특검팀이 ‘박 대통령 뇌물수수’ 혐의라는 목표에 집착해 기업들을 과도하게 옥죄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2001년 이용호 게이트 특검에 특별수사관으로 참여했던 이창현 한국외대 교수는 “돈 뜯어내려고 하니 뜯기는 김에 회사 사정도 고려해 달라고 말한 측면도 있어 보인다.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애로사항을 해결해 달라고 한 게 아니라면 공갈 협박의 피해자로 볼 여지도 있다”고 설명했다.

단순 뇌물죄 적용 여부는

삼성 측 수뇌부의 신병처리 방침과 함께 특검 수사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은 어떤 혐의를 적용하느냐다. 당초 박 대통령이 기업들에 제3자인 최순실씨를 지원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는 구조의 ‘제3자 뇌물죄’ 적용이 유력했다.

하지만 특검이 최씨 주변에 대한 광범위한 수사를 통해 박 대통령과 최씨가 일종의 ‘경제공동체’, 즉 ‘박 대통령=최씨 일가’임을 보여주는 여러 정황 증거들을 확보하면서 일반 뇌물죄를 적용하는 쪽으로 기소 방향이 바뀌는 분위기라고 한다.

기업 측의 ‘부정한 청탁’이 있었음을 증명해야 하는 제3자 뇌물죄보다 대가성이 있다는 점만 보여주면 되는 일반 뇌물죄는 입증이 보다 용이하다. 특검은 출범 초기부터 최씨 일가 재산에 대한 광범위한 계좌추적을 벌이는 한편 박 대통령의 제부인 신동욱 공화당 총재, 최씨의 이복 오빠 최재석씨 등을 불러 조사했다.

만약 일반 뇌물죄를 적용한다면 향후 이어질 재판 과정에서 특검과 박 대통령 측의 법리 다툼이 치열하게 전개될 전망이다.

이름도 다르고 사는 곳도 다른 두 법적 실체를 한 사람처럼 보기 위해선 많은 조건이 충족돼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6월 대법원이 파기환송한 정옥근(65) 전 해군참모총장 사건은 경제공동체 입증의 어려움을 보여준다. 검찰은 당초 STX그룹이 정 전 총장의 장남이 주주로 있는 Y사에 국제관함식 행사 후원비로 7억7000만원을 보낸 것을 정 전 총장에 대한 뇌물로 판단해 기소했다.

‘정 전 총장=장남=Y사’라는 전제에서다. 이유로는 ?정 전 총장이 장남과 함께 거주하며 생활비를 부담한 점 ?장남에게 Y사 출자금을 지원해 준 점 등을 들었다. 대법원은 “33%인 정 전 총장 장남의 Y사 지분 보유율 등을 감안하면 후원금을 정 전 총장에 대한 뇌물로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두 사람이 생활공동체임을 인정해 준다고 해도 아들이 일부 지분을 보유한 회사까지 하나의 공동체로 볼 순 없다는 의미다.

김철 법무법인 이강 변호사는 “다른 사람이 받은 뇌물을 공무원이 받은 것과 동일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아내 등 생활이익을 같이하는 가족이거나 사회 통념상 받은 사람이 공무원의 대리인으로 볼 수 있을 정도여야 한다”고 설명했다.

특검팀은 이르면 15일 삼성그룹 수뇌부에 대한 신병처리 방향을 결정함과 동시에 관련 수사를 일단락 지을 전망이다. 이후 삼성그룹과 함께 미르·K스포츠재단에 출연한 SK와 롯데, CJ, 현대차 등에 대해 본격적 수사를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

이규철 특검보는 지난 12일 브리핑에서 “삼성 외 대기업에 대한 수사도 기록이 와 있어 검토 중에 있다”고 했다.

마지막 퍼즐은 언제쯤 맞춰질까

일부 대기업은 관련 증거가 공개되기도 했다. 특검팀은 2015년 8월 사면을 며칠 앞두고 교도소에 수감 중인 최태원 SK 회장을 만난 김영태 SK 부회장(당시 커뮤니케이션위원장)이 “왕회장이 귀국을 결정했다. 우리 짐도 많아졌다. (왕회장이) 분명하게 숙제를 줬다”고 말한 녹취록을 확보했다.

대화 내용 중 ‘왕회장’은 박 대통령을, ‘귀국’은 최 회장 사면을, ‘숙제’는 대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지난 1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2부 심리로 열린 최순실씨와 안종범 전 수석에 대한 3차 공판에서도 김창근 당시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이 안 전 수석에게 사면에 보답하겠다는 취지의 메시지를 보낸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이 밖에 롯데는 서울 시내 면세점 사업자 선정, CJ그룹은 이재현 회장의 사면, 부영그룹은 세무조사 무마를 대가로 미르·K스포츠재단에 출연했다는 의혹으로 수사선상에 올라 있다.

특검팀은 최근 이중근(76) 부영그룹 회장과 이형희(55) SK브로드밴드 사장, 장선욱(59) 롯데면세점 대표이사 등 삼성그룹이 아닌 다른 대기업 고위급 인사들에 대해 출국금지 조치했다.

박 대통령에 대한 조사는 이 같은 다른 대기업들에 대한 수사까지 마무리되는 시점에서야 진행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 특검보는 박 대통령 조사 시점에 대해 “아직 언급하기는 이른 단계”라고 말했다. 법원장 출신의 이동명 법무법인 처음 변호사는 “다른 대기업 수사 외에 블랙리스트, 비선 의료 의혹, 정유라 이화여대 입학 비리 등 모든 수사의 정점에는 박 대통령이 있다.

여기에 관련된 우병우 전 민정수석,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에 대한 수사가 마무리된 2월 중순 이후에나 박 대통령을 조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민제 기자 letm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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