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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때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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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호 22면

옆에 앉았던 여자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부터 침울했다. 한숨을 여러 번 쉬었다. 영화가 중반부를 넘어서자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마지막에선 울음과 콧물이 동시에 흐르는지 몇 번 코를 세게 풀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 여자는 이제까지의 일이 미안해졌는지 황급히 일어섰다.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비켜줘야 했기 때문에 나는 여자의 얼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실컷 울어 충혈된 눈이 나를 바라봤다. 그 눈이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영화 관람 방해해서 정말 미안해요. 그런데…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냥 영화 한 번 더 보세요….’


이 영화를 여러 번 봤다는 지인이 많았다. SNS의 프로필을 이 영화의 포스터로 바꿔 놓은 친구들도 셋이나 있었다. 개봉한 지 몇 주 되지 않았는데도 모 영화평론가의 블로그에서 네티즌이 뽑은 2016년도의 영화가 되었다는 걸 알게 됐다. 도대체 왜?


영화를 본 친구에게 묻자 그녀는 다미엔 차젤레 감독의 전작 ‘위플래시’보다 백만 배는 더 좋다고 했다. 관람을 종용하는 그녀의 주문이 특별했다. 이 영화를 세 번 이상 보면 억장이 무너질 거라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본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좋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게 친구의 전언이었다.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어떤 이유에서든 잃지 않은 사람이 존재하기는 한단 말인가.

[달라서 좋았던, 하지만 이젠 달라서 문제가 되는]
그날 나는 뮤지컬을 싫어하는 남자와 ‘라라랜드’를 봤다. 뜬금없이 노래하고 춤추는 주인공들의 행위에 전혀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 남자다. 그 남자는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발레 역시 좋아하지 않는다. 대체 왜 발끝으로 힘들게 서서 몸을 뒤튼 채 빙글빙글 돌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는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인가. 그는 사진가이며 재즈 애호가다. 하지만 나는 그가 좋아하는 영화를 대체로 싫어했고, 그는 내가 사랑하는 작가들이 관념적이고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취향은 너무나 달라서 연애 시절 분쟁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물론 연애 초기, 서로의 ‘다름’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마음을 증폭시키고 결핍을 채운다. 하지만 곧 문제가 되는 시기가 온다. 너의 ‘괜찮아’와 나의 ‘미안해’가 끝없이 어긋나 조금도 만나지지 않는 것이다.


‘라라랜드’의 미아와 세바스찬 역시 그랬다. 미아는 세바스찬이 ‘신’처럼 모시는 재즈에 무지했다. ‘재즈’하면 떠올리는 건 케니 G 정도였고, 이런 발언은 세바스찬에게 재즈에 대한 모욕이었다.


하지만 미아 역시 예술에 무지한 사람이 아니다. 카페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배우를 꿈꾸는 청춘이었으니 말이다. 세바스찬 역시 클럽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있지만 재즈 뮤지션이라는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현실적 이유로 ‘타코 바’로 바뀐 전설적인 재즈 연주장 앞을 매일 지나치며 언젠가 자신이 그곳을 인수하겠다고 결심한다.


사랑에 빠진 이들은 서로의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하지 않고 닮아간다. ‘우리’를 만들기 위해 양보하고, ‘나’라고 믿었던 자신을 잃어가며 조금씩 마모된다. 세바스찬은 (미아를 위해!) 재즈에 대한 신념을 버렸다고 믿었던 친구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의 밴드에 들어간다. 수백 번의 오디션에서 떨어진 미아는 (세바스찬의 지지로!) 자신의 이야기를 대본으로 쓰고, 스스로 연극 무대에 오른다. 세바스찬은 타협했고, 미아는 망했다. 타락과 혹평 사이에서 서로에게 날카로워진 그들은 자신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서로를 가장 아프게 찌른다.


[두 사람이 시작해 한 사람의 선언으로 끝나는 것]


이처럼 서사구조로만 얘기하면 ‘라라랜드’는 지극히 평범하다. 사랑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 대체적으로 연대기적으로 기술돼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두 사람의 합의에 의해 시작된다. 하지만 한 사람이 “싫어!”를 외치는 순간 멈춘다. 그것이 사랑에 대해 우리가 그토록 많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본질적 이유인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시작한 사랑이 어째서 한 사람의 일방적인 ‘말’ 때문에 끝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아직 너를 잊지 못했는데 너는 정말 나를 잊어버렸단 말인가! 정말로? 사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이 영화가 왜 그토록 특별한지 알 수 없었다. 마지막 장면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가령 이 영화의 ‘낭만성’은 조금 다른 지점에서 발화된다. 서로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 미아와 세바스찬은 대신 꿈을 이룬다. 이 문장을 우리는 그들이 사랑을 이루는 ‘대신’ 꿈을 이루었다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다. ‘대신’이라는 말은 선택의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규정하기 때문이다. 선택하는 순간 선택하지 않은 것은 배격된다. 미아는 세바스찬에 이끌려 보게 된 오디션 때문에 파리로 떠난다. 그들이 왜 헤어졌는지 영화는 말해주지 않는다. 대신 5년 후, 세바스찬이 운영하는 재즈바에서 이들이 우연히 만났을 때, 미아의 곁에 있는 아기와 남편으로 그간의 사정을 짐작해볼 수 있을 뿐이다. 분명한 건 이것이 5년 전, 미아가 꿈꾸었을 미래와 다르다는 것이다.


‘라라랜드’의 주인공들은 꿈을 지키는 대신, 함께 미래를 꿈꾸던 사랑을 잃는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가 메우지 못할 결핍은 미아가 평생 감당해야 할 몫이다. 5년 후의 우연한 재회가 주는 노스탤지어는 그러므로 모두 ‘가정법’안에서만 힘겹게 작동한다. 만약 그때, 그와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그 시절, 그녀의 목소리를 내가 한 번만 더 들어줬더라면-.


우리에게는 가슴 시릴 아름다운 가정법이지만, 만약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졌더라면, 그들의 꿈은 멀어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건반을 두드리는 세바스찬이 객석에 앉은 미아를 바라보며 연주하는 ‘만약에’라는 상상을 도취한 듯 감상했다.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삶이지만, 수십, 아니 수백 번은 살아봤을 법한 헤어지지 않은 그들의 ‘오래된 미래’를 말이다.?


[잃어버린 사랑을 다시 재생한다면]


내 옆에 앉았던 여자가 눈물을 쏟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는 헤어진 옛 남자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저지르지 않았을 실수의 목록을 끝없이 헤아렸을 것이다. 그것이 이 영화의 비밀이었다. ‘라라랜드’는 사랑을 잃어버렸던 사람들에게 ‘만약에’라는 가정법을 다시 한 번 재생시키는 영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내 옆의 남자를 바라봤다. 뮤지컬을 싫어하는 그 남자가 ‘라라랜드’를 좋아해서 놀랐다. 이유를 물었더니 “그냥”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라라랜드’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봐서는 안 될 영화라는 걸 뒤늦게 눈치챘다. 만약 우리가 함께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그 역시 조금쯤 울지 않았을까. 나 역시 그렇지 않았을까.


그날 심야에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면서, 헤어진 여자친구로부터 1년 만에 만나자는 전화를 받고 공황상태에 빠졌다는 남자에게 농담처럼 이렇게 말했다. 먹을까 말까 할 때, 먹는 건 대부분 후회를 동반한다고. 하지만 무엇을 할까 말까 할 때는 해보라고. 과거를 바꿀 수 있는 건 오직 현재뿐이라고.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해보지 못한 일 때문에 하는 후회보다, 한 일에 대해 후회하는 편이 낫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 시절, 나 역시 헤어진 그에게 연락했었다. 침묵을 택한 건 그의 선택이었다. 죽도록 괴로웠지만 결국 죽지 않았고 그럭저럭 살아있다. 마음이란 것에는 굳은살 같은 건 생기지 않는다는 것도 배웠다. 연애는 도무지 학습이 불가하다는 것도.


진짜 사랑을 하고 있다면, 언제나 매 순간 너무 아프고, 너무 기뻐서, 당혹스러울 것이다. 사랑만큼 자신이 바보라는 걸 명확히 보여주는 사건도 없다. 하지만 이런 진실을 알게 해준 것도, 지금의 내가 있는 것도, 그때 내 선택 때문이었다. ●


백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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