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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바르샤바, 유럽의 실리콘밸리 노리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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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현장에서 본 ‘퀴리 부인의 나라’

폴란드 강소기업 비고시스템은 직원이 80여명뿐이지만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한 적외선 탐지 설비 분야에서 세계적 기술력을 인정받는다. [바르샤바=이창균 기자]

폴란드 강소기업 비고시스템은 직원이 80여명뿐이지만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한 적외선 탐지 설비 분야에서 세계적 기술력을 인정받는다. [바르샤바=이창균 기자]

지난해 12월 14일(현지시간) 오후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 있는 ‘코페르니쿠스 과학센터.’ 지동설로 유명한 16세기 폴란드 천문학자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의 이름을 따 2010년 설립된 이곳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자연스레 기초과학에 흥미를 갖게 하는 ‘체험형 전시물’로 가득했다. 레버나 버튼 등으로 직접 전시물을 조작하면서 과학적 원리를 터득할 수 있다.

‘왜·어떻게’ 과학교육으로 인재 육성
구글·IBM 등 150곳 R&D 센터 유치
EU 가입 후 성장률 회원국의 4배

300여 명의 관람객 사이를 뚫고 ‘버뮤다 삼각지대(수십여 선박·비행기가 실종된 해역)’를 주제로 한 전시물 앞에 섰다. 핸들을 돌리자 수조 안에서 크고 작은 물결이 일어났다. 바닷물과 파도를 형상화한 것이다. 작은 파도가 먼저 친 다음 큰 파도가 치고, 반복될수록 서로 얽히면서 보통 파도의 10배 크기 ‘이상 파랑(波浪)’이 발생한다. 파도는 해수면과 바람의 마찰로 심해지는데, 북대서양의 폭풍우가 이 일대 이상 파랑 현상을 심화시킨다. ‘아!’ 원리를 이해한 순간 모니터가 퀴즈를 냈다. “선박들은 왜 불가사의하게 실종됐을까요?”

다른 원인이 또 있는 걸까. ‘1번. 지구 자기장의 교란’ ‘2번. 태양복사’ ‘3번. 메탄가스 거품’이란 선택지가 떴다. 오답을 지우고 정답을 맞히라는 삼지선다(三枝選多)의 의미가 아니다. 셋 모두 정답이거나 현재 정답으로 추정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3번을 클릭하자 ‘해저에서 자연 생성된 메탄가스가 해수면 위로 떠올라 만든 많은 거품이 선박을 에워싼다. 이 원리로 바닷물이 공기보다 가벼워지면 선박이 부력을 잃으면서 침몰할 수 있다’고 알려줬다. 1·2번을 클릭해도 비슷한 식이다. 폴란드의 과학 교육이 ‘무엇(what)’을 가려내는 입시용 주입식보다는 ‘왜(why)’와 ‘어떻게(how)’, 즉 원리를 알아내고 공유하는 데 초점을 뒀음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시내 공립학교에 다니는 관람객 카샤(15)는 “책으로 배웠던 내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며 “장래희망인 과학자가 되려면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코페르니쿠스의 후예, 폴란드인들은 지금 ‘지식혁명’에 한창이다. 마치에이 팔코브스키 폴란드 외교부 사무관은 “지식 기반의 경제 성장만이 디지털 경제 시대에 밝은 미래를 보장해준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했다. 2013년 민간에서 시작돼 올 초 폴란드 정부가 공식 도입한 코딩(컴퓨터 프로그래밍) 교육 프로그램 ‘코딩 마스터스’는 매년 수만 명의 참가자들로 성황을 이룬다. 5~6세 아동도 태블릿과 퍼즐을 활용해 쉽게 코딩의 원리를 배운다. 창의·사고력이 쑥쑥 자라난다. 야체크 르기에비치 삼성전자 현지 법인 이사는 “코딩은 21세기의 새로운 언어”라며 “기계와 소통하는 방법을 제시해준다”고 했다.

노벨상 2회 수상자 마리 퀴리까지 배출한 폴란드의 학구열은 뿌리 깊은 ‘지적 호기심(epistemic curiosity)’에서 비롯됐다. 『큐리어스(Curious)』의 저자 이언 레슬리는 이를 이렇게 정의한다. ‘깊이 있는 지식과 이해, 더 많은 노력을 요하면서 방향성을 한층 부여한 종류의 호기심.’ 입시나 입신양명만을 위한 수동적 학구열에는 없는 요소다. 임선하 전 서울시교육복지종합지원센터장도 말한다. “지적 호기심은 정보에 대한 굶주림에서, 혹은 자신의 지식이 불충분함을 깨닫는 데서 비롯된다.”

1906년 설립된 바르샤바경제대학(SGH)은 한 해에 58개국에서 800여 명이 유학하러 올 만큼 대외적으로 명성이 높다. 독일·프랑스 등 선진국에서도 온다. 유학생들은 강렬한 지적 호기심이 오가는 이 학교 특유의 분위기에 매료됐다. 경제대학이지만 커리큘럼 안에 빅데이터 같은 정보통신기술(ICT) 분야가 포함됐다. 배우기를 희망하는 학생 수요가 많은데다 학교 측도 ‘경제+ICT’의 융합형 전문가를 길러내는 데 팔을 걷어붙였다. 이곳 재학생의 10% 정도는 창업에 뛰어들고, 이들이 만든 스타트업은 전자상거래나 게임 같은 다양한 ICT 분야로 진출 중이다.

젊은 인재들의 지적 호기심은 기업이나 국가 입장에선 ‘혁신’의 촉매제다. 바르샤바 외곽에 있는 ‘비고시스템’은 직원 수가 80여 명뿐이지만 ICT를 활용한 적외선 탐지 설비 분야에서 세계적 기술력을 인정받는 강소기업이다. 2015년 전체 소득이 2007년 대비 3.6배였는데 90% 이상은 유럽과 미국 등 해외에서 발생했다. 미 항공우주국(NASA)의 우주개발 사업, 유럽우주국(ESA)의 화성 탐사 프로젝트 ‘엑소마스(ExoMars)’에도 참여했다. 루카시 피에카르스키 비고시스템 이사는 “회사 전체가 신기술에 완전히 적응할 수 있는 인재들로 구성됐다”고 했다. 공장에서 만난 한 기술자가 은연중에 지적 호기심을 드러냈다. “복잡해서 쉽진 않지만 늘 신기술을 배우는 데 도전합니다. ‘카피캣(독창적이지 않고 다른 기업 제품을 모방해 만드는 것)’은 거부합니다.” 폴란드엔 이 회사 외에도 카본 등 신소재, 인공혈액, 가상현실(VR) 콘텐트, 항공 같은 고부가가치 사업 분야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는 강소기업이 가득하다.

호기심 많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고급 인력이 많다는 것은 고부가가치 사업을 추구하는 글로벌 기업들이 투자하기 좋은 환경임을 의미한다. 이미 바르샤바에만 구글·삼성·IBM·오라클 같은 글로벌 기업의 연구개발(R&D)센터 150여 곳이 진출했다. 업무프로세스아웃소싱(BPO)·셰어드서비스센터(SSC) 같은 고부가가치 아웃소싱 거점도 나날이 확대되고 있다. 폴란드가 ‘유럽의 실리콘밸리’로 부상하고 있다는 말이 나온 배경이다.

실제 폴란드는 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와 함께 동유럽의 떠오르는 4개국 ‘비셰그라드(V4)’를 형성, 악전고투 중인 유럽연합(EU)의 새 엔진으로 떠올랐다. 폴란드는 EU 가입 이후 지금까지 경제 규모가 거의 2배로 성장했다. 2005~2015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연평균 3.9%로 EU 회원국 평균(0.9%)의 4배 이상이었다. 특히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28개 EU 회원국이 마이너스 성장(-4.4%)에 신음했는데 폴란드만 2.8% 성장하는 저력을 과시했다. 이후 지금껏 성장률이 매년 EU 평균치를 크게 상회하면서 EU의 ‘모범생’이 됐다. 이 기간 EU에서 한 번도 역성장하지 않은 나라는 폴란드가 유일하다. 지적 호기심으로 무장한 젊은 인재들이 만들어낸 강소기업과 기술력의 힘이다.

최현수 코트라 바르샤바무역관 차장은 “폴란드는 제조업과 최신 ICT의 융합으로 부가가치 창출을 노리는 ‘4차 산업혁명’을 염두에 두고 R&D와 산업 혁신에 박차를 가하면서 지속 가능한 경제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며 “저성장 시대를 맞은 한국에도 시사점을 주고 있다”고 전했다.

바르샤바(폴란드)=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

※자세한 내용은 이번 주 발행한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 1월 16일자(1368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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