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view &] 한국경제, 모범생보다 모험생이 살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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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리 메리츠자산운용 대표

존 리
메리츠자산운용 대표

올해도 한국 경제전망은 어둡다. 지난해 한국의 수출액은 4955억 달러로 전년보다 5.9% 감소했다. 수출이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건 무려 58년 만이다. 주요 기업의 실적 둔화는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는데 불확실한 정치 상황마저 경제심리를 위축시킨다. 안팎으로 악재가 켜켜이 쌓인 건 맞다. 그렇다면 한국 경제는 정말 희망이 없을까? 내 생각은 다르다. 난이도가 높은 시험을 앞둔 학생은 걱정을 할 게 아니라, 공부를 더 해야 한다. 지금 한국의 경제 주체가 해야 할 일은 우려가 아니라 고민하고, 따져보는 일이다.

사교육에 갖힌 교육시스템 바꾸고
금융시장에도 새 바람 불어 넣어
당장 위기 극복보다 체질 개선을

현재 한국 경제가 처한 구조적 문제로 빈부격차 심화, 인구 고령화, 가계 부채 증가, 부족한 노후 준비, 기업 경쟁력 둔화 등이 꼽힌다. 사실 이 난제는 하루아침에 우리 앞에 던져진 게 아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던 1990년대 말부터 꾸준히 제기된 것들이다. 물론 약간의 차이는 있다. 당시의 경제 위기는 대기업에 집중된 경제 정책과 더불어 불투명한 회계, 높은 부채비율, 열악한 기업지배구조 등이 주원인이었다. 도화선이 기업 부채라는 점에서 가계부채가 걱정인 지금과 다르다. 어쨌건 그렇게 힘들게 위기를 극복하고, 약 20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지금 한국의 상황이 그 당시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당장의 위기를 넘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체질을 바꾸는 것이다. 구제금융 당시엔 못했더라도 이제는 해야 한다. 한국이 좀 더 나은 경제 시스템을 갖추려면 인적 자원의 가치를 높이고, 금융자산의 유연성을 갖추는 게 절실하다. 우리가 축적해온 인적 자원과 금융자산이 부가가치가 높은 곳으로 자연스럽게 투자되는 구조를 만드는 게 개혁의 본질이다. 이 개혁이 성공하려면 불합리한 제도를 손 보고, 잘못된 인식을 바꿔야 한다. 어지간한 의지로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지금 획기적인 변화에 나서지 않으면 위기는 언젠가 또 한국을 덮치게 돼 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교육 시스템을 바꾸고, 금융시장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어야 한다. 한국 교육은 투자 대비 생산성이 매우 낮다. 세계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데 교육 현장은 여전히 학교 성적에만 몰두하고 있다. 좋은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을 못하는 현실을 모르고, 무조건 공부만 잘하라고 한다. 사교육비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부어 부모의 노후까지 흔들리지만 변함이 없다. 가계부채가 늘어나는 게 꼭 집 때문만은 아니다. 이 사이 전 세계는 4차 산업혁명을 향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암기 공부에 쏟는 시간과 비용을 학생의 창의력을 높이고, 글로벌 감각을 키우는데 써야 한다. 국가 경쟁력은 ‘모범생’이 많은 나라가 아니라, ‘모험생’이 많은 나라에서 나온다. 미국과 중국이 그걸 증명하고 있다.

금융 개혁 또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금융산업은 부가가치와 고용 효과가 무척 크다. 또한 금융의 발전은 다른 산업에 미치는 영향력이 클 뿐 아니라 새로운 생각을 현실화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과거 한국이 제조업을 통해 부를 창출했다면, 앞으로는 지식 산업에 투자를 해야 하고 그 투자를 통해 부를 창출해야 한다. 많은 젊은이가 금융산업에 진출하고, 금융을 통해 신산업에 뛰어들 수 있도록 길을 터줘야 한다. 그러려면 장기 로드맵이 필요한데 지금 한국 경제부처와 주요기관 수장은 1~2년에 한 번씩 바뀐다. 이래서는 답이 없다.

국민연금도 역할이 있다. 국내 주요 연기금의 주식투자 비중은 일본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한국은 아직 ‘자본이 일하게 하는 방법’에 미숙한 것이다. 한국에서도 구글이나 우버가 태어날 수 있도록 연기금이 과감하게 나서야 한다. 당장의 수익률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미래에 큰 기업이 될 떡잎을 찾아내는 노력 또한 게을리해선 안 된다.

한국은 힘이 있다. 여러 차례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입증됐다. 땅덩어리는 작아도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를 가지고 있고, 교육 수준 역시 세계 최고다. 과거의 성장을 통해 축적한 자본력도 강점이다. 이 소중한 자산들의 가치를 더욱 높이려면 과거의 잘못된 관행과 이별하는 게 먼저다. 20년 뒤 또다시 위기를 맞을 순 없지 않은가?

존 리 메리츠자산운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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