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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겨읽기] 조상님들 풍류에 '노름'이 없을쏘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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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
유승훈 지음, 살림, 252쪽, 1만 2000원

요새 '올인(All In)'이란 말을 많이 쓴다. 자기가 믿는 것에 '다 걸기'라는 뜻이다. 옛날에도 '올인'에 바로 들어맞는 단어가 있었다.

한문 용어 '고주(孤注)'다. '고주'는 노름꾼이 남은 밑천을 다 걸고 마지막 승부를 겨루는 일을 말한다. 인생이 한바탕 노름판이라면 우리는 하루하루 사회가 짠 판 속에서 '고주' 하는 승부사인 셈이다. 그런 노름은 여러 가지다. 어젯밤 꿈을 새김질하며 사는 로또 복권,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지르는 주식투자도 넓게 보면 도박이다.

'노름'은 결국 '놀음'이고 '놀이'가 아니던가. '놀이하는 인간(호모 루덴스)'에게 도박은 삶의 우연과 경쟁과 현기증을 한꺼번에 몰아오는 우리의 일상이다. 유승훈(36.부산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 씨는 '투전고'라는 논문을 쓰면서 우리나라 도박의 역사에 눈 돌리게 되었다. 옛날 사람은 뭘 하고 놀았을까 싶어서 뒤진 사료 속에서 조상님네가 꽤나 놀았던 자취를 발견했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 혜원 신윤복이 묘사한 조선시대의 노름 현장. 국보 제135호 ‘혜원풍속화첩’에 실린 ‘쌍륙삼매’는 두 쌍의 남녀가 야외에서 풍류를 즐기다가 쌍륙을 두는 장면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조선시대의 대학자였던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다산시문집'에 실린 한 편지에서 "경자년 봄에 촉석루에서(…) 심비장과 함께 저포 노름을 하여 3000전을 가지고 여러 기생들에게 뿌려주며 즐겁게 놀았던 일을 기억하십니까?"라고 썼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였던 연암 박지원(1737~1805) 또한 편지를 쓰다가 문장이 막히면 쌍륙을 쳤다고 한다. 저포와 쌍륙은 주사위 두 개를 던진 뒤에 나온 수만큼 말을 움직이는 놀이다. 연암은 혼자서 왼손 오른손을 갑.을 양편으로 삼아 대국을 하다가 구상이 떠오르면 다시 붓을 들었다다. 조금 과장됐다 싶은 책 제목은 여기서 왔다.

도박의 눈으로 당대 사회사를 읽고 싶었던 유씨는 우리 역사 속에서 도박과 노름의 문화사를 훑어내린다. 경주 안압지에서 발굴된 14면체 참나무 주사위를 보고 신라의 귀족이 주사위 놀이로 밤을 지새웠다고 짐작한다. 고려 시대에는 오늘날의 경마나 경륜과 비슷한 '스포츠 도박' 격구가 있었다. 조선 후기에 널리 퍼졌던 도박은 돈을 건 뒤 패를 뽑아가며 승부를 겨루는 투전이다. 일제 강점기에 유행했던 화투놀이는 망국병이라 일컬어질 만큼 판돈이 컸다.

동서고금을 오가며 우리나라 도박의 실상을 좌충우돌 살핀 지은이가 내린 마무리 글은 좀 싱겁다. '잃었을 때 떠나라'가 '에필로그를 위한 변명'이다. '흥미로운 일상의 역사' 수준으로 이 책을 쓰고자 했다는 그는, 훈계조의 윤리서로 흐르는 것을 경계했다면서도 결국 도박 앞에서 회초리를 든 훈장님이 되고 말았다. 도박이란 코드를 통해서 본 일상사의 결말이 참으로 참담했기 때문이었을까? 모순은, 그의 말처럼 도박꾼이 잃었을 때 떠날 수 있었다면 이 책은 씌어질 수 없었을 것이란 점이다.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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