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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적인 성과만 챙기면 종업원들은 능력 아낀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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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호 20면


세계중소기업학회(ICSB)가 지난해 49개국 사람중심 기업가정신지수를 조사한 결과 한국은 이탈리아·일본과 함께 신중간소득함정(Neo Middle Income Trap)에 빠져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중간소득함정은 구매력기준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 후반과 3만 달러 초반 대에서 7년 이상 머무르는 경우에 나타난다. 유엔 산하 세계은행(WB)은 돈이 부족한 개발도상국 기업들이 설비투자에 실패해 효율성 향상에 실패한 경우를 1만 달러대의 중간소득함정이라 정의한다. 그러나 2만 달러대 후반의 신중간소득함정에 빠진 국가들은 돈이 아니라 사람 관리에 실패하는 경향이 있다.


이탈리아와 일본은 전통산업에서 세계적인 강점을 가지고 있지만, 내수시장중심의 활동적 타성(Active Inertia)에 젖어있어 새로운 파괴적 혁신에 취약하다. 이탈리아는 안경, 기계류, 보석, 가죽 및 신발, 가구, 직물 및 의류 등 전통산업에서는 강점을 가지고 있는 반면 디지털산업으로의 변신은 아주 느린 편이다. 일본은 아날로그 경제에서 품질관리라는 강점으로 80년대까지 경제 혁신을 주도했지만 90년대 이후 갈라파고스화되면서 정체를 겪고 있다. 한국은 한때 혁신에 성공했지만, 기업들은 신사업 기회를 끊임없이 탐색하고 적시에 포착하는 능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기업가정신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이것이 2006년 이후 10년간 국민소득 2만 달러대에 머물러 있는 주요 이유다.

[내수에 안주한 일본, 중기 210만개 폐업]
한국 경제는 중소기업이 글로벌화에 실패하면서 정체기에 빠졌다. 2005년 이후 중소기업의 해외투자 비중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대기업들도 조선이나 중공업 등에서 중국의 등장에 대응하지 못했다. 그 결과 도망가는 선진국과 급속히 성장하는 중국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다. 가장 큰 문제는 현재에 안주하는 '베짱이 증후군'에 빠져 기업가 정신이 약해지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을 보여주는 케이스가 한둘이 아니다.


첫째, 내수시장에 치중하는 중소기업들은 성장하는 글로벌시장에서 고립되고 있다. 지난 10년간 중소기업의 매출액 가운데 해외수출 비중이 10%대 초반에서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 성장하는 해외시장 포착에 실패하면서 중소기업들이 느끼는 체감경기는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내수시장의 파이가 커지지 못하고, 그나마도 제로섬의 풍선효과로 한 기업의 성공은 다른 기업의 실패를 만들 뿐이다. 잃어버린 20년의 시작이었던 95년 일본을 연상케 한다. 일본의 갈라파고스화는 이후 10년간 210만여개의 중소기업이 폐업하는 원인이 됐다.


둘째, 우리 사회는 2만 달러대의 국민소득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생겼다. 해외여행에서 귀국하는 입국 심사장에서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소리는 “한국이 제일 좋아”다. 그만큼 외국에 비해 한국의 인프라가 많이 좋아졌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헬조선'이라 한다. 40번 이상 일본을 방문한 필자가 90년대 나리타공항에서 일본인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일본이 제일 좋아”다. 당시 일본에서는 요리 방송이 가장 인기였고, 일본인들은 가장 음식이 맛있는 나라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 기업들도 해외 진출을 기피하고 '니폰이치(일본에서 1등)'를 외치다가 결국 문을 닫는 경우가 많았다.


셋째, 우리나라 서점에는 꿈을 키우고 도전하는 인생이야기보다는 힐링 관련 도서가 과다하게 많다. 위로와 힐링은 절대로 필요하다. 그러나 힐링은 일시적인 진통효과는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한다. 꿈이 없는 젊은이에게 오늘의 힐링은 내일의 불만이 된다. 작업장에서 힐링 강의가 있고 나면 다음날 제품불량율이 높아진다. 힐링에 익숙해지면 사람들은 미래를 위해 적극적으로 도전하고 꿈을 키우기보다는 안주하고 수동적이 되기 쉽다.


넷째, 기업가들은 위험을 감수한 적극적 미래 투자보다는 모든 의사결정에서 배임을 먼저 걱정하고 있다. 해외자원 개발에 앞장섰던 에너지 공기업들의 투자실패가 사회적 문제가 되면서, 공기업들은 대다수 해외시장에서 철수했다. 오늘날 수출 감소의 씨앗이 된 셈이다. 한국수출입은행에 따르면 급성장하고 있는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에 대한 투자는 2011년을 기점으로 지속적으로 감소했고 아세안 수출도 감소하고 있다. 기업들이 실패한 투자에 대한 배임에만 많은 관심을 기울이면서 변호사 시장만 커지는 아이러니가 나타나고 있다.


다섯째, 반기업정서는 날로 심화되어가고 있다. 기업이 전략적 해외진출에서 실패하는 경우 그 경영자는 무능력한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경우가 많다. 이에 따라 우리 기업들은 기회도전형 투자경영보다 재산을 관리하고 지켜나가는 수동적경영에 빠져 있다. 낮은 부채비율이 이를 잘 반영한다. 많은 기업들이 100% 미만의 낮은 부채비율을 자랑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는 타인자본을 지렛대로 삼아 기업 성장을 견인해가는 재무 레버리지 효과와 위험감수를 포기한 결과고, 안주경영의 증거다.

[하면 된다, 효율성 경영으론 선진국 못 가]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이상의 선진국들은 ‘사람 경영’을 통해 이 문제를 극복해가고 있다. J커브 모델에서 보는 것처럼 사람중심 기업가정신지수가 높아질수록 신중간소득함정에서 탈출할 가능성이 커진다. 한국 기업들은 자본·기술·사람의 3대 생산요소 중 자본과 기술을 중시하는 반면, 사람은 원가와 비용요소로 인식해 구조조정에 몰입하는 경향이 있다. 아직도 신자유주의 시대의 단기 성과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J커브 모델에서 선진국들은 창조성과 혁신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의 주체적인 참여와 몰입을 이끌어내는 사람중심 경영, 사람중심 기업가 정신을 통해 지속가능한 진화를 성취했다.


한국 기업가들의 경영 스타일은 아직도 단기효율성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종업원은 업무에 몰입하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2013년 갤럽이 세계 142개국에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전 세계 종업원들 중 직장에서 주인의식을 가지고 업무에 최선을 다하는 비율은 평균 13%에 불과했다. 그런데 미국은 30%인데 한국은 11%로 평균 이하다. 한국 직장인 10명 중 9명은 책상에 앉아 있지만, 업무에 집중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4만 달러 이상 선진국들의 경영 스타일은 사람들의 몰입을 통해 혁신을 이끌어가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1902년 창업 이후 지속성장하고 있는 3M은 업무시간의 15%를 종업원 스스로 창의성 개발에 투자하게 한다. 신제품 매출이 전체의 40% 이상을 차지해야 한다는 것이 3M의 목표다. 종업원들의 창조성이 신제품 개발로 연결되면서 이 원칙을 이어갈 수 있었고, 지속가능 성장의 원천이 됐다.


반면 한국 경영자들은 사업 그 자체보다 사람 관리에 실패하고 있다. 이제 종업원을 혁신과 창조로 이끌어가야 하는데도 다수의 기업가들은 종업원에게 수치적인 성과를 달성하도록 채찍질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이렇게 하면 종업원들의 업무 성과는 오히려 떨어진다. 경영자가 종업원을 육성하고 격려하면 최선을 다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지만, 과다한 통제가 일어나는 경우 자신의 능력을 평가 기준을 맞추는 데만 집중하고 나머지는 다음에 주어지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아껴놓기 때문이다.


종업원들에게 ‘열심히 하라’, ‘하면 된다’고 질타하는 것은 1만 달러 시대의 요소투입 경제를 위한 경영학이다. 자본 투자를 많이 하고 사람을 구조조정하는 것은 2만 달러 시대의 효율성 경제를 위한 경영학이다. 3만 달러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사람의 아이디어가 만들어내는 혁신과 몰입이 중요하다. 기업의 문제는 이미 종업원들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이들이 해결 아이디어를 내기만 해도 기업은 놀랄 만한 변신이 가능하다. 교세라의 이나모리 가즈오가 일본항공을 살릴 때 사용한 방법이다.


한국의 경영 방식도 이제 사업중심 사고에서 사람중심 사고로 대전환이 필요하다. 신중간소득함정에서 빠져 나오려면 이제 ‘공감’과 ‘직원 키우기’를 통해 이들이 창조와 혁신의 주인공이 되도록 해야 한다. 종업원을 효율성의 도구로 볼 것이 아니라, 주인의식을 가지고 즐겁게 몰입하여 혁신을 주도하도록 배려하는 기업이 앞으로는 성공한다. 


김기찬 가톨릭대 경영학부 교수전 세계중소기업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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