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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 2035

상장 없는 연말을 보내는 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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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혜미 JTBC 정치부 기자

김혜미
JTBC 정치부 기자

다섯 살짜리 조카가 며칠 전 어린이집에서 상장을 하나 받아왔다. 가족 그림편지 쓰기 대회에 참여해 받은 ‘가족나눔상’.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꼬맹이가 상을 받다니. 손자의 첫 수상에 감격한 아버지는 현관문 앞에 상장을 걸어두셨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볼 때마다 맘에 걸린다. 꼬맹이가 어린이가 되고, 어른이 되어서도 마주해야 할 상장의 무게를 알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절 성적이 좋은 몇 명은 꼭 상을 줬다. 보통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어야 상을 받을 수 있었다. 한 반에 60여 명, 상을 못 받는 55명은 ‘의문의 1패’를 하고 돌아가야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른들의 세계에도 상은 넘쳐난다. 연말이 되니 더하다. 박사 학위를 밟고 있는 친구는 ‘올해의 최고 논문상’, 영업사원으로 일하는 친구는 ‘올해의 베스트셀러’, 공무원으로 일하는 친구는 ‘기관장 표창’ 앞에 다시 1패를 당했다. “일못(일 못하는 사람)이 된 기분이야.”

책 『미움받을 용기』가 내놓은 상장의 배경은 이렇다. "잘했다. 장하다. 훌륭하다는 칭찬은 누군가를 자기보다 아래로 보고 무의식 중에 상하관계를 만들려는 거다.” 유독 우리나라에 학교든 회사든 할 것 없이 상이 많은 건 엄격한 상하관계 문화의 영향도 있는 듯 하다. 누군가의 가치관에 맞춘 상을 받은 사람이 많은 나라보단 상을 못 받아도 자기 뜻대로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 많은 나라였으면 좋겠다.

한 사람의 삶이란 게 그런 상장으로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건 아니니까. 또 따져보면 승승장구한 사람만큼이나, 고군분투한 사람의 한 해도 얼마나 훌륭한가. 해봐서 알지만, 일을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데도 꿋꿋이 버티는 게 훨씬 더 힘들다. 나는 사람들이 예전처럼 방송사의 연말대상 시상식을 챙겨보지 않는 게 반갑다. 상이란 게 별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 같아서 말이다.

얼마 전엔 더 반가운 어머님까지 등장했다. 상 앞에 작아지는 건 연예인도 다를 게 없는 모양이다. 연말 방송국에서 주는 상을 못 타서 미안하다는 40세가 다 된 아들(영화평론가 허지웅)의 고백에 엄마의 답이 화제다. "상이 뭐가 중해? 지금도 훌륭해.”

나는 올해엔 법륜 스님의 해법을 눈여겨보기로 했다. 일을 잘 못하면 웃기라도 잘하라신다. 스님하면 염불인데, 염불 못하는 스님도 다 이렇게 쓸모가 있다시며. 상장 하나 없는 연말이지만 나는 받은 사람들에게 크게 한 턱 쏘라고 해야겠다. 기자하면 특종이지만 특별나게 잘 먹는 게 내 장점이니까. 상보다 사람과 함께할 수 있어 아름다운 연말이다.

김혜미 JTBC 정치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