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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제작자 인터뷰 릴레이⑥ '날, 보러와요' 제작한 영화사 OAL 김윤미 대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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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날, 보러와요’(4월 7일 개봉, 이철하 감독)가 극장에 걸린 지난 4월, 이 영화가 잘될 것이라 점친 이는 거의 없었다. 주연 배우 강예원·이상윤의 흥행 파워는 약해 보였고, 순제작비는 10억원에 불과한 영화였다. 게다가 개봉 시기는 극장가의 전통적인 비수기였다. 흔히 ‘빅4’라 부르는 대형 투자·배급사가 밀어주는 작품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독수리 에디’(4월 7일 개봉, 덱스터 플레처 감독) 등 쟁쟁한 경쟁작을 물리치고 개봉 첫 주 관객 수 1위를 기록했고, 최종적으로 관객 106만 명을 모으는 기염을 토했다. 누구라도 인정할 올해 최고의 ‘깜짝 흥행’. 그 뒤에는 영화사 OAL 김윤미(42) 대표의 뚝심이 있었다.

사진= 라희찬(STUDIO 706)

사진= 라희찬(STUDIO 706)

날씨가 유난히 쌀쌀하던 날, 서울 강남구에 자리한 영화사 OAL 사무실을 찾았다. 반갑게 인사하는 김 대표를 따라 들어선 아늑하고 따뜻한 회의실에는, 방금 구운 고소한 고구마 냄새로 가득했다. ‘손님 맞이용’ 군고구마와 귤 그리고 magazine M 최근 호가 정갈하게 놓인 테이블을 앞에 두고, 그는 “이제 시작이라 굉장히 쑥스럽다. ‘날, 보러와요’에 투자해 주신 분들, 이 영화를 만든 모든 분들께 고맙다. 그 덕에 이룬 성과”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 겸손함에, 창립작으로 OAL의 이름을 충무로에 단단히 새긴 그의 내공이 묻어 있는 듯했다.

‘날, 보러와요’로 손익분기점을 넘긴 것은 물론, 기대 이상의 흥행을 끌어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처음 이 영화를 만들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뛸 땐, 이 영화가 잘 될 것이라 기대한 이는 드물었다. 주연 배우 이상윤씨는 상업영화가 거의 처음인 데다, 강예원씨에게 ‘코믹한 캐릭터 이상의 모습이 나올 것’이라 기대한 이도 없었다. 투자받기가 정말 어려웠다.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가 관객 100만 명 이상 들 것임을 자신했다. 원래 스릴러 장르 매니어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인 퀄리티만 보장된다면, 관객 120만 명은 들 수 있다’고 믿었다. 돈 내고 영화 보러 와서,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기분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런 믿음만으로 투자자들을 설득하는 게 힘들었을 텐데.
 “(영화) 시장에서의 ‘주제 파악’을 잘했다고 해야 하나. ‘이 소재와 주제로 얼마만큼의 관객을 모을 수 있을까’ 끊임없이 고민했다. 관객 100만 명을 들게 할 자신은 있었지만, 손익분기점을 관객 수 60만 명에 맞춰 순제작비를 10억원으로 낮췄다. 그 덕에 투자자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 제작비가 부족한 탓에 이철하 감독님이 많이 고생하셨다. 투자·배급사를 비롯해 감독·배우·스태프 등 모든 분이 도와준 덕분에 좋은 결과가 나왔다.”
마케팅 포인트도 무척 잘 잡았다. 특히 수아(강예원)가 정신병원에 끌려가는 장면을 담은 강렬한 예고편은 10~20대 관객에게 크게 주목받았다.
“홍보·마케팅 비용이 굉장히 빠듯했는데, 설상가상으로 홍보물을 다 만들어 놓은 상황에서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 판정을 받았다. 고민하다, 분명한 타깃 광고를 하기 위해 5000만원 들여 예고편을 새로 찍었다. 저예산 영화인데 그 돈 주고 예고편을 다시 찍는다 하니 다들 ‘미쳤다’고 했다. 하지만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고, 스마트폰을 자주 보는 젊은 관객을 공략해 화면에 꽉 차는 ‘세로형 예고편’으로 만들었다. 개봉 첫날 스크린 수는 경쟁작 ‘독수리 에디’에 밀렸지만, 그 덕분에 점차 상영 규모를 늘려 갈 수 있었다.”
영화 `날, 보러와요`

영화 `날, 보러와요`

결과적으로 시장과 관객을 면밀히 파악한 것이 주효했던 것 같다. 극장에서 일을 시작해 배급·수입 등을 거친 내공 덕분인가.
"2000년에 메가박스에서 일을 시작했다. 16개관을 가진 극장이 오픈한다니 ‘영화는 원 없이 보겠구나’ 싶어 뛰어든 일이었다(웃음). 그런데 영화를 16편이 아니라 5~6편만 볼 수 있었다. 2~3개관에서 같은 영화를 상영하니까. 거기서 상업영화 트렌드를 배우게 됐다. 아카데믹한 영화만 보던 내가 편협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관객이 택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다 쇼박스에서 배급 업무를 맡게 됐다. 힘들었지만 ‘이 영화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극장에서 틀 수 있을까’ 많이 고민한 시간이었다. 점점 제작에 욕심났지만, 당시는 배급하던 사람이 제작한다고 하면 선입견부터 갖던 때였다. 그래서 지인과 함께 영화사 구안을 만들어 예술영화 수입·배급을 먼저 시작했다.”
대작이 아닌 중소 규모 영화에 대한 애정은 그때 다시 솟아난 건가.
“맞다. 구안에서 일하며, 작지만 다양한 영화를 보고 자란 관객이 또 다른 영화들의 강력한 지지자가 되는 현장을 목격했다. 잠깐 잊고 있었던, 예술영화·중소 규모 영화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때 생각했다. 영화 일은 ‘그냥’ 하면 안 되는 것이라는 걸.”
그냥 ‘먹고살기 위해’ 하면 안 된다는 말인가.
“영화 한 편을 담아내는 건, 하나의 세계관이나 하나의 문화를 보여 준다는 거다. 대충하면 안 되겠더라. 잘 내놓아야 관객의 보는 눈이 성장하고, 그래야 또 다양한 영화가 나오는 선순환이 이뤄진다. 중소 규모 영화가 탄탄하지 않으면 새로운 감독과 관객이 나올 수 없고, 우리는 유명한 감독들의 ‘1000만 영화’만 나오길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될 거다. 관객 1000만 명이 공감할 스토리가 있다면, 5만 명이 공감할 스토리도 있다. 계속 대형 영화만 극장에 걸린다면 다른 영화를 보고 싶은 관객은 어디로 가야 하나. 할리우드가 예술영화에 꾸준히 투자했기에 개성 있는 감독들이 배출됐고, 그들이 대작에 도전해 ‘예술성 있는 대작’을 만들기도 하지 않나. 반면 일본은 오리지널 시나리오 투자에 소홀했기에 새로운 관객층을 끌어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나는 영화계에서 오랫동안 밥벌이하고 싶다. 그래서 이 생태계를 지키는 데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다(웃음).”
영화 산업을 두루 이해한 경험이 제작자로 일하는 데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이 소재와 주제로 관객 몇 명을 만날 것 같아?’ 스스로 분석해 보는 훈련을 하며 쌓아 온 노하우가 있다. ‘이 이야기는 아무리 해도 관객 300만 명 정도일 듯해. 그러니 손익분기점을 얼마로 잡아야 하고, 캐스팅은 이렇게 가야 해’ 등 산업을 이해하는 눈이 생겼다고 할까. 제작을 늦게 시작한 것이 단점이라면, 내가 만드는 영화의 자리를 빨리 정할 수 있는 기획력을 갖춘 것은 장점인 셈이다. 뜬구름 잡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날, 보러와요’에 관객 200만 명이 들면 그건 로또지(웃음)! 요즘 ‘‘날, 보러와요’만큼만 만들면 투자하겠다’는 투자자들이 꽤 있다고 해서 뿌듯하다. 영화계에서 다양한 일을 하며 가장 크게 배운 것은, 뭐니 뭐니 해도 ‘관객을 절대 무시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돈을 받아 사람들을 모아서 그 힘든 걸 찍고, ‘보기 싫으면 보지 마. 그래도 작품은 남았으니까’ 이러면 안 된다는 것.”
영화 `날, 보러와요`

영화 `날, 보러와요`

김윤미 대표를 키운 영화를 꼽아 본다면.
 “쇼박스에서 배급 일을 할 때 수입팀에서 태국 영화 ‘옹박:무에타이의 후예’(2003, 프라챠 핀카엡 감독)를 들고 왔다. 너무 좋아서 반신반의하면서도 개봉을 밀어붙였는데 결과가 좋았다. 자신감을 얻게 됐다. 그 뒤로도 여러 영화를 거쳤지만, 영화사 구안에서 ‘렛미인’(2008,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을 배급한 것이 크게 기억에 남는다. 영화는 정말 좋은데, 마케팅 포인트가 막막했다. 듣도 보도 못한 스웨덴 영화에, 장르를 구분 짓기도 애매했다(웃음). 그래서 CGV 무비꼴라쥬(현 CGV 아트하우스)와 손잡고 ‘공포영화 컬렉션’을 열었다. 그 안에 ‘렛미인’을 넣어 첫선을 보였는데 반응이 정말 좋았다. 개봉 때는 폭발적이었고. 괜찮은 영화를 적절한 시기에 작전을 잘 짜서 내놓는다면, 관객이 분명 반응한다는 걸 알게 됐다. 물론 주변에서 도와주고 운도 따라야 하지만.”
OAL의 목표라면.
“그 소재와 주제에 적합한 사이즈로 영화를 내놓을 수 있는 영화사로 자리 잡는 것, 그게 목표다. 관객 1000만 명이 공감할 주제라면 그렇게 만들고, 5만 명이 공감할 이야기라면 또 거기에 맞춰 만들 수 있는. 꼭 만들고 싶은 이야기라면, 그 영화에 맞춤한 ‘옷’을 만들어 그 규모가 10억원짜리면 10억원을, 20억원짜리면 20억원을 들여 남들에게 흔들리지 않고 제작하고 싶다. 장르나 규모에 제한은 없다.”
‘남들에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
“가령 어떤 이야기가 있다면, 인지도와 관계 없이 그에 어울리는 배우가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의 흥행 파워가 약하다는 이유로 다른 배우를 추천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치자. 그렇게 하면 더 잘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더 유명한 배우가 들어오는 바람에 그 이야기만의 고유한 분위기가 깨질 수도 있다. 그럴 때 흔들리지 않고, 이 영화에 적확한 배우를 캐스팅해 밀어붙이고 싶다. 결코 중소 규모 영화만 만들겠다는 고집이 아니다. 그 영화의 몫을 잘 구현해, 투자자도 배우도 신뢰할 수 있는 제작사가 되고 싶다는 뜻이다.”
좋은 영화 프로듀서가 설 토양이 점점 좁아지고 있기에 더욱 쉽지 않은 일일 터다. 좋은 레스토랑에서 셰프와 경영자 역할이 둘 다 중요하듯 영화도 그러할 텐데, 프로듀서의 역할과 입지에 대한 고민도 많을 것 같다.
 “그렇다. 대기업 투자·배급사의 경우 대개 감독과 ‘직거래’하고 싶어한다. 그게 더 효율적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영화 한 편이 탄생하기까지의 수많은 장벽을 프로듀서가 정리해 주지 않으면 감독은 영화에 집중할 수 없다. 그걸 프로듀서 없이 투자사에서 직접 진행하려면 인력을 한없이 늘려야 하는데, 그 또한 부담 아닌가. 제작사에 책임과 권한을 명확히 주는 것이 투자사에도 이로운 일이다. 다른 이야기지만, 투자 시스템도 좀 더 다양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소위 ‘빅4’ 투자·배급사가 아니면 투자받기 힘들고, 거기서 투자받지 않을 경우 작품이 별로인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보다 다양한 곳에서 돈을 끌어올 수 있는 시스템이 확립되면 더욱 다양한 작품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OAL’이란 회사명은 어떻게 나왔나.
“함께 회사를 차린 김이정 이사가 이름을 정말 잘 짓는다(웃음). ‘Once in A Lifetime’이란 뜻이다. ‘가장 찬란한 인생의 한순간을 영화를 통해 보여 주고 싶다’는 의미다. ‘모든 것’이란 뜻의 ‘올(All)’로도 읽을 수 있어 좋았다.”
작품을 고를 때 중시하는 게 있다면.
“시나리오를 읽을 때 ‘내가 심장을 꺼내 놓을 정도로 하고 싶은 이야기인가?’라고 나 자신에게 묻고 또 묻는다. 그게 첫 번째 기준이다. 한 편의 영화를 만든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이 고생스러운 일을 다시 할 수 있을 만큼 말하고 싶은 이야기인가 고민한다. 아, 그런 점에서 제작하는 선배들은 모두 존경스럽다(웃음).”
<김윤미 대표의 주요 필모그래피>
렛미인’ 토마스 알프레드슨 | 카레 헤레브란트, 리나 레안데르손 | 2008 영화사 구안에서 배급한 스웨덴 영화.
조용한 마을의 기이한 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김 대표는 “나 자신에게 ‘이젠 자신감을 가져도 돼’라고 말할 수 있게 한 작품”이라 평한다. 공포영화 컬렉션을 열어 입소문을 낸 후 한동안 영화를 공개하지 않아 관객의 호기심을 증폭시켰다. 이후 CGV에서 단독 개봉하는 전략을 취했다. 10개관에서 오픈한 영화는 며칠 후 상영관이 30여 개로 확대됐다. 감독과 배우의 인지도가 전무한 상황에서 관객을 9만 명 가까이 그러모았다.


‘공모자들’ 김홍선 | 임창정, 최다니엘, 오달수, 조윤희 | 2012 김윤미 대표가 타임스토리에서 일할 당시 공동 제작하고 투자한 영화.

김 대표가 “‘날, 보러와요’의 전초전과 같았던 영화”라고 말하는 작품이다. 임창정·최다니엘 주연으로, 제작 당시 주변 사람들의 반대가 심했다. 장기 밀매를 소재로 한 스릴러영화인데, 배우 임창정의 코믹 이미지가 워낙 강했고 최다니엘의 흥행 파워 또한 미미했기 때문. 투자받는 데 애먹었지만 김 대표는 반전이 있는 시나리오의 힘을 믿었다. 관객 120만 명을 예상했는데 164만 명을 기록해 수익이 났다.


웹 드라마 ‘먹는 존재’ 이철하 | 안영미, 노민우, 유소영 | 2015 작가 들개이빨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레진코믹스가 전액 투자하고 OAL에서 제작한 10부작 웹 드라마.
김 대표는 “사실 지금 웹 드라마의 시장성은 전혀 없지만, 장르 실험을 해 보고 싶어 제작한 작품”이라고 말한다. 웹 드라마가 마케팅 도구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아 수익성을 고민하고 있지만, 꾸준히 도전할 예정이라고.


‘소환의 밤’(준비 중) OAL이 현재 준비 중인 차기작.
김 대표는 “다이빙을 소재로 한 여성 영화로 ‘블랙 스완’(2010,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 같은 느낌의 작품”이라고 귀띔했다.

여성 영화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김윤미 대표를 만난 건 문단을 필두로 영화계와 미술계 등에서 ‘문화계 내 성폭력’이 한참 이슈되던 때였다. 오랜 시간 영화계에서 버텨 온 김 대표도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원래 성격을 숨기고 정말 센 척하고 살았어요. 술도 그래서 마셨죠. 여성으로 일하는 것이 불리하지 않았다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요? 센 척하느라 너무 힘들었어요(웃음). 남성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숱한 고민으로 시간을 보냈죠.” 그는 최근 불거진 문제를 보고 생각이 많았다며, ‘걷기왕’(10월 20일 개봉, 백승화 감독) 이야기를 꺼냈다. “그 영화를 만든 친구들이 모든 스태프를 대상으로 성희롱 예방 교육을 실시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너무 고마웠고, 많이 배웠죠. 앞으로 제가 만드는 영화 제작 현장도 그렇게 바꿔 나가려 해요. 그간 ‘센 척’하며 견뎠을 뿐,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에 맞설 생각은 하지 못했죠. 그런데 이렇게 다 같이 조금씩 움직여야 할 때 아닌가 싶더라고요.” 그에게 여성 영화인의 길을 걸어갈 후배들에게 들려줄 조언을 청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저도 선배들을 보고 걷는 중이라, 조언하기엔 너무 조심스러워요. 다만 ‘동지’들에겐 이런 말을 하고 싶어요. 우리가 조금 힘들더라도 같이 견디자고. 그러면 후배들은 좀 더 괜찮은 환경에서 일하게 될 테니까요(웃음).”

글=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사진=라희찬(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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