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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60% 집어삼킨 삼국지 피바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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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2호 23면

유비(왼쪽)와 손권

떠들썩함과 웃음소리, 풍성한 만찬에 얼큰한 술기운….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밤하늘 멀리 폭죽이 올라가 요란한 폭음과 화려한 섬광으로 터진다. 설을 맞는 중국의 저녁 풍경이다. 이 무렵이면 예외 없이 중국 전역은 폭죽으로 요란하다. 화려한 불꽃은 적어도 슬픔의 정서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기쁨이나 쾌락·환희 등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설을 맞아 폭죽을 쏘아대는 중국인은 분명 그런 감정의 파동에 젖는다. 중국인 세시풍속(歲時風俗)의 간판에 해당하는 폭죽 이야기다.


그러나 속을 헤집어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는 생각이 든다. 폭죽은 원래 ‘年(년)’이라고 적었던 ‘괴물’을 쫓아내기 위해 고안한 방도였다. 그 괴물은 몰래 사람을 잡아간다고 했다. 사람들은 결국 시끄러운 소리의 폭죽을 터뜨려 괴물을 쫓았다고 한다. 따라서 폭죽은 괴물에게 잡혀가지 않고 이 땅에 살아남기 위한 사람들의 ‘슬픈’ 노력으로 만들어진 산물이라 해도 좋다.


중국인들은 실제 폭죽을 터뜨리면서 왕성한 사람의 기운을 과시한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여전히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그 점이 기쁨과 쾌락·환희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럼에도 폭죽을 통해 중국인들은 ‘사람의 기운(人氣)’으로 ‘여전히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1949년 사회주의 중국 건국에 성공한 마오쩌둥(毛澤東)은 1950년대 말에 접어들어 과격한 좌경화 흐름에 들어선다. 전통적인 가정의 틀을 깨고 집단 생활체제인 인민공사(人民公社) 제도를 도입하는가 하면, 그를 바탕으로 대규모 증산(增産)을 독려하는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에 나선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수 천 년 이어져 온 중국의 가족 전통이 그에 맞을 리 없었고, 집의 쇠솥이나 농기구 등을 모두 녹여 철강을 증산한다는 발상도 중국 현실을 개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경작지의 생산량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으나, 위의 눈치나 보면서 허위보고에만 열중하는 관료의 폐해로 중국은 급기야 심각한 상황을 맞는다.

당나라 수도가 있던 장안은 이제 시안(西安)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명나라 때 쌓은 성루와 지금 시안의 시내 모습이다. 이처럼 중국 곳곳에는 전쟁의 흔적을 알려주는 성곽이 들어서있다. [중앙포토]

대약진운동 실패로 3000만~4000만 사망 추정인민공사와 대약진운동으로 비정상적인 죽음을 맞아 유명을 달리한 중국인의 수? 유감스럽게도 미스터리다. 중국 공산당은 아직까지도 정확한 사망자수를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그를 면밀하게 추적한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노력에 의해 드러난 숫자는 매우 충격적이다.


중국 당국은 이를 두고 확인도, 부정도 하지 않는 입장이다. 그러나 3000만~4000만 명 정도가 이 기간에 굶어 죽거나, 기아에 허덕이다가 다른 병을 얻어 비정상적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점은 정설에 가깝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숫자다.


해방 직후 전국의 인구를 “3000만 동포”라고 했던 한반도의 경우를 생각하면 더 그렇다. 그러나 전란이 빗발치듯 닥쳤던 중국, 가뭄과 홍수가 거대하게 번졌던 대륙의 사정을 감안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일, 다반사(茶飯事)라고 하기에는 민망해도 중국의 역사무대에서는 전혀 생경하지 않았던 일이기 때문이다.

조조

우리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통해 대륙에서 펼치는 남성들의 웅혼한 매력을 읽는다.(曹操)로부터는 지략(智略)의 방대한 스케일, 유비(劉備)로부터는 인내와 포용의 인간 철학, 손권(孫權)으로부터는 경국(經國)의 방략(方略)을 본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들이 일으킨 피의 바람, 그 거대한 회오리에는 비교적 둔감한 편이다. 이들이 일으킨 전란에 휘말려 도대체 어느 만큼의 사람들이 죽었는지, 왜 그들은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 나아가 꼭 그래야 했는지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위(魏)·촉(蜀)·오(吳) 세 나라가 ‘세발솥’의 정족(鼎足)과 같은 형국을 만드는 이 삼국시대는 인구의 감소가 가장 참혹할 정도로 돋보였던 때다. 학자들의 통계에 따라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전체 인구의 60% 정도가 줄었다는 게 중국 인구와 이민(移民) 역사 분야에서 가장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학자 거젠슝(葛劍雄, 현 중국 교육부 사회과학위원회 위원)의 설명이다. 혹자는 그 인구 감소의 비율이 높게는 90%에 이른다고도 주장한다.


영웅들의 전쟁… 숱한 사람 목숨 잃어어쨌든 권력을 제 손아귀에 넣기 위해 ‘대륙 영웅’들이 벌인 숱한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거젠슝의 연구에 따르면 중국 인구의 증감(增減)은 매우 비정상적이다. 그의 통계를 따라가 보자. 우선 중국 천하를 최초로 통일의 판도로 이끈 진시황(秦始皇) 때의 전국 인구는 3000만 명을 웃도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진시황의 진나라 왕조가 패망하면서 극도의 혼란이 닥친다. 농민 기의(起義)가 번졌다가 항우(項羽)와 다툼을 벌인 유방(劉邦)이 한(漢)을 세우면서 가까스로 안정을 찾는다. 당시 인구는 1500만~1800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 3000만 명에서 이 정도로 줄었으니 급감(急減)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통일왕조인 한나라의 치세에는 인구가 급증한다. 서한(西漢)이 왕조로서의 명운을 다 할 무렵인 기원후 2년에 이르면 인구는 6000만 명까지 불어난다. ‘급감↔급증’은 중국 역사 초입에서 이미 두드러지는데, 사실은 이후 늘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왕망(王莽)이 세운 신(新)나라가 등장하는 등 혼란기를 겪으면서 6000만 명의 인구는 3500만 명으로 다시 줄었다. 이어 동한(東漢)이 기울던 157년 무렵의 인구는 비로소 서한 때의 6000만 명을 회복했다. 그러나 또다시 ‘롤러코스트 장세’였다. 급등(急騰)했다가 또 급락(急落)으로 이어졌다는 얘기다.


황소(黃巢)의 난에 이어와 유비·손권 등이 맹활약하는 삼국시대가 펼쳐지면서 인구는 거듭 크게 줄어든다. 184년~220년 사이의 일이다. 이 때의 인구 감소도 대단하다. 6000만 명의 인구가 2300만 명으로 쪼그라들고 만다. 60%의 감소 폭을 기록한 것이다.


이런 현상은 또 이어진다. 북방의 유목민족이 대거 중원으로 들어서는 5호16국(五胡十六國)과 동진(東晋) 등의 시기도 마찬가지다. 이어 다시 통일왕조로 중국을 석권한 수(隋)는 혼란기를 수습하는 데 성공했으나 다음 당(唐)나라 때까지 혼란이 이어지면서 중국의 인구는 2500만 명선에 머문다.


태평의 성세(盛世)를 두 차례 기록한 당나라는 지독한 내란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역대 중국 인구의 최고봉을 기록한다. ‘안사(安史)의 난’이 벌어지기 직전인 755년의 인구는 9000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안사의 난’에 이어 오대(五代)의 분열시기를 거치면서 인구는 또다시 급감한다.


그 뒤를 이어받은 통일왕조 북송(北宋) 초기 인구는 4000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 강성했던 당나라 치세의 인구 절반 이상이 줄어든 수치다. 북송의 통일왕조 기반에서 인구는 다시 폭증한다. 1100년 무렵 중국 인구가 최초로 1억 명을 돌파했고, 여진족의 금(金)과 거란족의 요(遼) 지역의 인구도 1000만 명을 웃돌았다.


북송은 다시 여진의 금나라에 밀려 분열시대를 맞았지만 각자의 판도에서 인구는 늘었다. 남송(南宋) 무렵 지금의 중국 판도에 살았던 인구는 최초로 1억2000만 명을 넘었다. 그러나 몽골의 원(元)이 중국의 패권 경쟁에 나서면서 북방의 인구는 80%나 줄어들었다. 극심한 전쟁이 휩쓸고 지나갔던 까닭이다.


17세기 초반 들어 인구는 2억 명을 돌파했으나 극심한 재해와 만주족인 청(淸)의 흥기, 중원 진입으로 또 도진 전란 때문에 인구는 다시 1억2000만 명으로 급감했다. 청나라 치세가 이어지면서 1850년에 중국 인구는 4억3000만 명을 기록한다. 그러나 ‘태평천국의 난’ 등이 겹치면서 1억 명의 인구가 또 줄어들고 말았다.


사회주의 중국이 들어선 뒤의 첫 인구조사에서 나타난 총 인구 수는 5억8000만 명이다. 이 중 3000만 명 정도가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 속에서 비정상적인 사망으로 사라졌다. 현재의 중국 인구는 13억 명, 때로는 14억 명으로 말해지기도 한다.


약 2000년 전 6000만 명의 인구에서 1850년 4억3000만 명으로 불어난 중국 인구의 증가세는 아주 완만했다. 여러 왕조 시대가 이어지는 오랜 시간 동안 인구의 증감(增減)이 롤러코스트 장세처럼 급락과 급등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그 근본적인 이유가 왕조 권력을 위한 ‘대륙 영웅’들의 아주 모진 다툼이었음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중국인들이 설날에 터뜨리는 폭죽놀이 모습이다. 폭죽에는 이 땅에 내가 무사히 살고 있음을 확인하는 중국인의 현세적 가치관이 담겨 있다. [중앙포토]

설날 폭죽 터뜨리며 쫓으려한 괴물 정체는조조와 유비·손권 등 삼국시대의 ‘영웅’, 나아가 역대 왕조 권력자들의 다툼 뒤에 숨어 있는 피의 색채가 얼마나 강렬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장졸(將卒)이 전장으로 달려 나가 죽었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전란의 소용돌이에 말려 쓰러지고 말았다.


피를 잔뜩 머금은 중국 역사의 실제 모습이다. 따라서 드라마틱한 영웅들의 활약상으로만 중국을 바라볼 일이 아니다. 중국인들이 만들어 낸 화려한 입담에 선뜻 취해서도 곤란하다. 이제는 실재했던 역사 속의 어두운 현상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중국을 이해할 일이다.


중국인의 폭죽도 그런 맥락에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요즘도 폭죽으로 ‘이 땅’에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이 돋보인다. 그렇다면 이들은 정말 무엇이 두려웠던 것일까. 전설처럼 전해졌던 ‘年(년)’이라는 괴물의 정체는 무엇일까. 끊임없이 이어졌던 전쟁이었을까. 시도 때도 없이 피바람을 일으켰던 ‘황제’는 아니었을까.


유광종 뉴스웍스 콘텐츠연구소장ykj33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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