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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처럼 봉사하며 조직 이끄는 사람이 진정한 리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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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1호 27면


경영이 인문학에 길을 묻는다면 반드시 만나야 하는 작품이 헤르만 헤세의 『동방순례』다. 저자 헤세는 1932년, 57세 되던 해에 판타지적 순례 이야기인 『동방순례(Morgenlandfahrt)』를 출간하였다. 이 이야기는 ‘비밀결사 또는 결맹(結盟·Bund)’에 가입하여 순례자들과 함께 동방으로 여행을 떠나는 H.H.의 여행기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H.H.는 저자인 ‘Herman Hesse’ 자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헤세는 이 순례여행기를 통해서 자신의 내면의 이야기와 사상을 풀어냈다고 볼 수 있다. 이 신비에 가득 찬 순례기는 동양의 현인들이 도를 닦으며 도를 찾아가는 과정과도 흡사하다. 이 소설은 오늘날 고학력·수평조직에 적합한 리더십 스타일로 손꼽히는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 즉 ‘섬김의 리더십’ 이론이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영감을 준 작품으로 유명하다.


하인 사라지자 순례의 의미 잃어노벨문학상 수상자이며 독일문학의 거두로서 인도철학과 노장사상에 정통했던 헤르만 헤세는 1877년 독일 남부 뷔르템부르크주의 소도시 칼브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인도학 학자였던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동방(인도와 중국)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다. 36세 때 인도여행을 다녀온 이후 그는 인도 철학에 더욱 심취하게 된다. 『동방에서』와 『싯다르타』 같은 작품은 그가 인도 여행 후에 출간한 동방에 관한 소설이다. 『동방순례』는 도가적인 내면의 각성과 직관의 힘을 통해 순례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순례자들이 결맹을 조직하고 길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순례의 과정을 그린 이 작품에는 상징과 암시, 그리고 메타포가 넘쳐난다. 작중에서 순례자들이 찾아가는 ‘동방’이란 지리적인 특정지역이 아니라 영혼의 고향 또는 인간 내면의 본향을 상징적으로 지칭하고 있다. 이 소설 속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H.H.가 인생 역정에서 만난 적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서술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동방순례에 나선 일행 중에 눈에 띄는, 독특한 하인이 한 명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레오였다. 그는 짐을 나르는 등 순례자들을 위해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하인으로서 다정하고 겸허한 사람이었다. 레오는 지식과 경험이 많았으나 섬기는 자세가 몸에 배어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삽살개·새와 같은 모든 동물이 그를 따랐다는 것이다. 가끔씩 멋진 휘파람을 불어 오랜 여행에 지친 일행을 즐겁게 해주기도 하면서 인간적인 매력을 물씬 풍기는 사람이었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순례의 여행은 스위스에서 이탈리아로 넘어가는 국경의 험준한 모르비오 인피리오레 협곡에서 위기를 맞게 된다. 순례단의 이상적인 하인인 레오가 여행 보따리와 함께 실종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순례자들은 하인 레오를 찾기위해 몇 날 며칠 야영을 하며 협곡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다. 순례단의 많은 하인들 중에 하인이 한 명 사라진 것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지만 미남에다 호감이 가는 젊은이, 게다가 충실한 하인 레오를 잃어버린 것은 모든 순례자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모두들 순례길을 계속해야 할 의미를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H.H.는 레오의 실종 후 순례를 계속할 모티베이션을 잃고 만다. 동방순례길을 포기하고 외롭게 집으로 돌아온 이래 그는 살아갈 의욕과 용기를 잃어버린 자신에 대해 엄청난 불만을 품고 살면서도 레오와 결맹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몇 년이 흘러, 레오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있던 H.H.는 친지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스위스 취리히에 살고 있는 레오를 다시 만나게 된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레오는 H.H.를 알아보지 못했다. 아니 모르는 체 했다. 레오와 허무하게 헤어진 H.H.는 그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것과 결맹에 다시 합류하고 싶다는 간절한 편지를 보냈다. 며칠 후, 레오가 다시 하인의 신분이 되어 H.H.를 찾아왔다. 결맹의 최고지도자가 부른다는 전갈을 전하고 그를 최고지도자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그곳에서 H.H.는 자수자이자 피고로서 재판을 받게 된다. 죄목은 동방순례 길에서 무단으로 이탈한 죄, 결맹의 비밀을 외부에 누설한 죄, 멤버십을 상징하는 결맹의 반지를 분실한 죄였다. 결맹의 상급자들은 그의 잘못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질책을 이어나갔다. 재판의 마지막에 최고지도자가 재판장으로 등장했다. 그는 자신의 방황을 자책하고 뉘우치는 피고 H.H.에게 조용히 다가와 그의 뺨에 키스를 하고 손가락에 그가 잃어버린 반지를 끼워주는 것이 아닌가! 결맹의 최고지도자이며 재판장은 바로 하인 레오였다. 그는 H.H.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고 그를 다시 결맹의 회원으로 받아들이는 결정을 내린다. H.H.는 충격으로 말을 잊고 그를 바라보았다. 하인이 최고의 영적 지도자라니….

그린리프가 ‘서번트 리더십’ 이론 정립영어로 번역된 『동방순례(Journey to the East)』를 읽고 크게 감명을 받은 한 미국인이 있었다. 그는 40년간 경영 컨설턴트로 활동했으며 60~70년대 미국 최고의 통신기업 AT&T의 경영 컨설턴트와 연수원장으로 근무했던 로버트 그린리프(Robert K. Greenleaf·사진)였다. 그는 하버드·예일대 등 최고의 스펙을 자랑하는 AT&T의 관리자들을 대상으로 경영 자문을 하고 교육 훈련을 실시하던 중 ‘지체 높고 똑똑한 사람들을 가르친다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것을 체득했다. 교육 내용이 자신들이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능가하지 못하는 강사에 대해서 가차 없이 비판하거나 시간 낭비라고 교육을 거부하는 등 콧대 높은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고학력에 자존심 강한 이들이 조용히 경청하고 강의 내용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면서 높은 만족도를 보이는 예외적인 강의가 있음을 알게 됐다. 그것은 철학자·시인·문학가와 같이 비록 스펙은 자기들보다 못하고 경영이 전공도 아니었지만 경륜이 있고 인생의 깊이가 느껴지는 강사들이 자신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진솔하게 풀어나가는 인생과 일에 대한 강의에는 마음의 문을 열고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이었다. ‘왜 그럴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던 그린리프는 우연히 『동방순례』를 읽다가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된다.

1 그린리프의 『서번트리더십』 관련 첫 저서. 2 『동방순례』 1932년 초판본. 3·4 『동방순례』 영어번역판.

“참된 봉사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가져다 줍니다. 오래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남에게 봉사해야 합니다. 남을 지배하려고 하는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해요. 이것이 봉사의 법칙이지요”라는, 레오가 H.H.에게 던진 말에서 그린리프는 전광석화와 같은 영감을 받았다. 그린리프는 훌륭한 리더란 섬기는 사람이면서 리더인 사람이며, 하인처럼 봉사하면서도 조직구성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는 사람이 진정한 리더라는 역설적 진리를 깨닫고 1970년 “The Servant as Leader”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서번트 리더십’ 이론을 정립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종래의 ‘나를 따르라’ 하는 리더 중심의 리더십이 전제적이고 수직적인 스타일인데 비해 섬기는 리더십은 섬김을 통해서 팀 워크와 공동체를 형성하는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다. 서번트 리더는 ‘청지기(steward)’로서의 삶을 사는 사람을 의미하는 데 청지기란 다른 사람의 물건과 일을 위탁 받아 관리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서번트 리더는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인식하며 추종자들의 자기성장과 만족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다. 또 서번트 리더의 특징은 대체로 남의 말을 귀담아 들으며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갖는다. 남을 치유하고, 설득하며, 남들의 욕구와 소원을 잘 파악하고, 그들의 고통과 좌절을 기꺼이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다.


그린리프가 주창한 서번트 리더십이론은 경영학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게 했다. 많은 리더십 학자와 전문가들은 서번트 리더십을 실제 직장에 적용했을 때 조직의 유효성을 높일 수 있는지를 분석했는데, 대부분 연구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서번트 리더십은 많은 경영자들이 자신의 경영 방침으로 채택하고 있으며, 경영 현장에서 사람들을 열광시키고 있다.


섬기는 리더십이야말로 현대의 조직과 경영자에게 적합한 리더십 스타일이라고 사람들은 주저 없이 말하고 있다. 수직적이고 복잡한 피라밋 조직이 평평한 수평조직으로 개편되면서 윗사람의 권한이 아랫사람들에게 이양되고 있는 과정에서 서번트 리더십은 조직 구성원의 마음을 얻고 조직의 목표를 쉽게 달성할 수 있는 적합한 리더십으로 등장하고 있다.


또한 서번트 리더십은 다른 문화권에서 활동하는 글로벌 경영자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리더십 스타일로도 꼽힌다. 권위적·전제적·통제적 리더십 스타일은 현지의 사람들에게 반감을 사기가 쉽지만 하인처럼 현지인들을 섬기면서도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구성원들을 공동의 목표로 무리없이 인도하는 서번트 리더십은 ‘문화적 시너지’를 창출하면서 기업의 목적을 달성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상대방 문화에 대한 존경, 그리고 낯선 사람들에 대한 겸손과 섬김의 정신은 글로벌 시대에 성공하는 리더가 될 수 있는 지름길이다.


경영자가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 제시80여 년 전에 씌여진 헤르만 헤세의 『동방순례』는 현대의 기업 경영자들을 위해 여전히 리더십의 보고가 되고 있다.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 그리고 빅데이터 분석을 통한 딥러닝이 일상 생활이 되고 있는 4차 산업혁명의 와중에서 과연 경영자는 어디를 향해 가야하며, 누구와 함께 가야하는지에 대해서 소중한 영감을 주고 있다. ‘진리는 가장 평범한 곳에 있다’는 말이 있듯이 남을 섬기고 받드는 사람이 위대한 리더가 될 수 있는 패러독스 현상은 지금 우리 주변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미 중국 춘추시대에 노자(老子)는 그의 저서 『도덕경』에서 서번트 리더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파하였다.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느끼지 못할 때 그는 가장 훌륭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그에게 복종하고 갈채를 보낼 때 그는 훌륭한 지도자에서 멀어지기 시작한다. 진정 훌륭한 지도자란 가급적 말을 적게 하면서 조용한 가운데 목표에 도달함으로써 그의 임무를 다하는 사람이다. 목표가 달성되었을 때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 모두가 이 일을 해냈다’고. 사람들을 이렇게 이끄는 지도자야말로 진정한 지도자다.”


김성국이화여자대학교 경영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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