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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친왕과 벌링게임, 초기 중·미 관계 초석 다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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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1호 18면


무슨 일이건 첫 단추가 중요하다. 노(老)제국 중국과 신흥대국 미국, 두 나라 관계는 출발이 좋았다. 한 둘이 아니지만, 공친왕(恭親王)과 앤슨 벌링게임(Anson Burlingame)의 공이 컸다.


아편전쟁에서 패한 청(淸)제국이 승전국 영국의 협박에 몰려 체결한 난징조약(南京條約)은 전형적인 불평등조약이었다. 대포를 앞세운 통상과 투자, 선교의 자유 요구는 수천 년간 유지된 중화(中華)와 주변국의 질서인 화이(華夷) 체계의 타도를 의미했다. 지식인들은 “두 눈 부릅뜨고 세계를 바라보자” 혹은 “오랑캐의 장점을 배워 오랑캐를 제압하자”며 목에 핏대를 올렸지만 말뿐이었다. 방법을 몰라 우왕좌왕했다. “영국의 대포가 황제의 권위를 파괴했다. 하늘의 제국을 지상 세계와 접촉하도록 내몰았다”는 낙관도 중국인들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신생국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관목(棺木) 취급받던 중국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지 않았다. 쉽게 부스러질 정도는 아니고, 스스로 치유할 능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아편전쟁 2년 후인 1842년 대통령이 의회에 출석해 난징조약의 내용을 상세히 설명하며 “중국과 동등한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외교사절단을 파견하겠다”고 공언했다.

[미 “중국과 동등한 외교관계 수립하겠다”]
이듬해 여름, 국무장관이 중국으로 떠나는 사절단원들에게 지시했다. “가능하면 베이징까지 가서 황제폐하를 알현토록해라. 우리 대통령이 서명한 국서(國書)를 정중히 전달하며 양국 간의 우의와 성실한 교류를 희망한다고 간청해라.” 중국 측에 반복해야 할 사항도 주지시켰다. “중국 영토 내에서 미국인이 모두가 인정하는 법규를 어겼을 경우 미국 정부는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관여하지 않겠다….” 이 외에도 중국의 구미에 맞을 당부가 많았다.


청나라 정부는 외국 공사들에게 베이징에 상주(常住)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유도 분명했다. “중국의 전통적인 관습을 무시하고, 생활 방식과 사상이 선조들이 제정한 법규를 어지럽힐 수 있다.”


중국에 도착한 미국 사절단은 중국 측 협상 대표의 유일한 목적이 ‘외국 공사(公使)의 베이징 입성 거부’라는 것을 눈치챘다. “베이징 입성 외에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는 제안을 받자 중국 측의 선물인 ‘영사 재판권’을 마지못한 듯이 수락했다.


보고를 받은 도광제(道光帝)는 흥분했다. “미국이 하늘의 뜻에 따라 우리에게 귀순했다”며 미국 사절단을 치하했다.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끈 중국대표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편전쟁은 한 차례에 그치지 않았다. 20년 후 두 번째 전쟁이 벌어졌다. 영국과 프랑스는 대규모 원정군울 중국에 파견했다.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톈진(天津)요새를 초토화시킨 연합군은 베이징을 향했다. 중도에 저항하는 중국인들을 사람으로 치지 않았다. 도처에서 인간 사냥이 벌어졌다. 남자들보다 하나의 절차를 더 치른 여인네들은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봉건시대 중국의 황제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좀 모자르거나 괴팍했던 몇 명을 제외하곤, 총명이 극에 달한 문화인이 대부분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인자함과 잔인함을 왕래할 줄 알고, 용맹을 겁으로 가장할 줄도 알았다. 문자와 언어의 유희는 타고났다는 말을 들어도 부족할 정도들이었다. 도광제를 계승한 함풍제(咸豊帝)도 그랬다.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을 압박하자 동생 공친왕에게 베이징을 맡기고 피서산장이 있는 청더(承德)로 순시를 떠났다. 황제가 우리를 버리고 도망쳤다며 원성이 자자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도망이 아닌 엄연한 순시였다.

[벌링게임, 중국 외교사절단 인솔 미국 방문]
전권을 위임받은 공친왕은 영국과 프랑스 양국과의 화의에 성공했다. 외국 공사들의 베이징 상주도 황제의 승인을 받아냈다. 프랑스 공사를 시발로 영국, 러시아 공사가 베이징에 공사관을 차렸다. 미국 공사 벌링게임은 1년이 지나서야 부임했다. 벌링게임은 온갖 눈치를 보며 훈수나 일삼는, 그렇고 그런 외교관이 아니었다. 공화당 창당 요원이며 철저한 노예제 폐지 주의자였다. 공친왕과 영국·프랑스 간의 협상이 끝날 무렵 미국 대통령에 선출된 에이브러햄 링컨은 벌링게임을 주중 미국공사에 임명했다.


벌링게임은 중국에서 자행한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의 만행을 대놓고 비난했다. 국무부에 중·미 합작 정책안도 제출했다. “무력을 동반한 외교 대신 공정한 외교활동을 전개해야한다. 중국 연안 지역에 조차지나 조계 설립을 요구하지 않는다.” 청나라 정부는 벌링게임이 주도한 미국의 대중국 정책에 호감이 갔다. 공친왕은 푸안천(蒲安臣·포안신)이라는 중국이름까지 지어주며 신임했다.


벌링게임은 6년간 베이징에 상주했다. 이임을 앞두고 외교부에 해당하는 총리아문(總理衙門)에서 송별연이 열렸다. 공친왕이 벌링게임에게 엉뚱한 제의를 했다. “해외에 사절단을 파견할 생각이다. 우리에겐 적합한 사람이 없다. 중국의 첫 번째 중외교섭사무대신(中外交涉事務大臣)을 맡아주기 바란다. 벌링게임은 공친왕의 청을 수락했다. 중국 외교사절 단장 자격으로 30명을 인솔해 상하이를 출발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미국이었다. 초창기 중·미 외교는 벌링게임이 양측을 주도했다. 결과도 나쁘지 않았다.<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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